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기타] 신기한 450년전 미이라 원형 발견 유적

1996년 11월 6일 오전 10시 경주정씨 제안공파(慶州鄭氏 齊安公派) 종산인 금촌읍 금능리 산 18의 10에서 조선조 중종때 참의 정온(參議鄭溫)의 묘소를 파주시 공설운동장으로 책정됨에 따라 이장작업을 하던중 시신이 4백50여년이 지난 오늘날 매장 당시 모습 그대로인 미이라가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입관된 시신은 170cm 정도로 얼굴형태와 뼈, 살 등이 썩지 않았으며 치아와 상투, 수염등 원형의 모습 거의 그대로였으며 내관 공간에 채워넣은 7겹의 수의옷 20여점과 다라니 경문 초상화도 그대로 있었다. 또한 내관 양면에 그려져 있는 나비무늬 장식과 연결 부위마다 송진이 칠해져 있고 목관은 두꺼운 석회로 덮여 있어 통풍이 안되어 전혀 부패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한다. 그 당시 종친회장으로부터 파주문화원에 연락이 되어 세밀히 조사하면서 발굴된 수의옷, 신발, 다라니 글씨가 적힌 내관 양면의 종이 등을 가지런히 펼쳐놓고 파주시 공보계에 통보하여 사진을 촬영 후 즉시 방송국과 언론기관에 연락을 하자 서울방송국과 신문에 보도되니 단국대학 박물관과 고려대학 박물관에서 이를 인수 수습된 옷가지의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현재 단국대학교 석주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질문[기타] 멸문지화를 당한 성삼문과 노은단

노은단은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忠南 洪城郡 洪北面 魯恩里) 성삼문이 성장한 유허비(遺墟碑)가 있으며 숙종 2년(1676) 노은서원을 세워 사육신을 봉향한 후 녹운서원(綠雲書院)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고종 8년(1871) 폐철되자 사육신의 위패를 땅에 묻고 사육신 노은단을 설단(設壇)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성삼문은 태종 18년(1418) 아버지 도종관 성승과 어머니 춘천박씨 사이의 큰아들로 이곳 고향인 금곡리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충남 홍주적동 외가집에서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번 들려 왔다고 해서 그의 조부 판중추부사 성달생(判中樞府事 成達生)이 이름을 삼문(三門)이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자리는 고려말 최영장군(崔榮將軍)의 생가터에 외조부 박첨(朴瞻)이 살고 있었으며 노은리를 둘러싼 삼봉산(三峯山)의 하나인 수리봉아래 최영사지(崔瑩祀址)가 있으며 이 마을 입구 성삼문 유허비 앞면은 송시열이 비문을 지어 세우지 못한 뒤 윤봉구(尹鳳九)가 뒷면에 다시 그 유래를 적어 세우고 적동(赤洞)을 노은동(魯恩洞)이라고 송시열이 칭하였다 한다. 노은단은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의 위패를 모시고 별사(別祠)에 성삼문 아버지 성승을 모신 충절의 사당이다. 성삼문은 어려서 고향인 파주시 천현면 금곡리(개목동) 할아버지 성달생에 지도를 받으면서 먹글씨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많이 흘러 개묵(溪墨)이라고 호칭되어 내려오며 성달생 할아버지와 자손들이 살던 생가터가 있다. 세종 20년(1438) 21세에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가 되어 많은 젊은 학사 중 가장 문장이 뛰어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수십차례 걸쳐 왕내하면서 음운(音韻)을 질의 연구끝에 훈민정음이 세종 28년(1446) 9월 29일 발포된 후에도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명나라 예겸(倪謙)을 찾아가 음운(音韻)에 대한 연구를 거듭 한글 창제에 공훈을 세웠으며 세종 29년 30세 때 중시 급제 정삼품(正三品)을 받아 8명이 공동수석이 되어 우열을 가리지 못하여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여 팔준도전(八駿圖箋)이 장원으로 성삼문이 발탁되니 임금께서는 하늘이 도와 임금이 나셨구나 하며 성인은 천년의 기운에 따랐고 땅은 말(馬)같은 것을 쓰지 못하였다 신물(神物)은 한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 감히 새그림을 그려서 예종 임금이 감식에 바치노라 팔준도전은 500여년 세월 속에 눈부시었다. 단종 1년(1453) 수양은 왕권을 잡기 위하여 한명회 권람 등과 계획을 세워 영의정 황보인 좌의종 김종서 등이 역모를 꾀한다는 구실을 삼아 단종 1년 격살하고 안평대군을 강화로 유배 사사한 후 중신들에게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기뻐하면서 잔치를 벌였으나 예방승지인 성삼문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네가 단종을 모신 후설지관(喉舌之官)이 아니냐하며 어찌하여 선왕인 세종 문종의 당부를 받았거늘 네손으로 옥쇄를 수양에게 넘겨주고 술잔까지 받는다는 말이냐 나는 너의 절의를 믿었거늘 참으로 우리 가문에 수치로구나 라고 호통을 치니 성삼문은 머리를 들지 못하고 아뢰기를 죽는것은 두렵지 않사오니 단조임금을 누가 복위시키겠습니까. 불초소자 목숨을 걸고 성사를 하겠다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뜻이 맞아 세조와 한명회, 권람, 정인지 등을 처치할 날을 기다리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영월로 유배하고 단종 3년(1455) 6월 11일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세조 2년 4월 마침내 명나라사신을 환영하는 축하연이 창덕궁에서 열리는데 도총란 성승과 유응부 등이 운검(雲劍) 칼을 차고 경호하게 되어 기회는 온 것이라면서 단단히 준비를 하였으나 한명회 등이 기미를 알고 운검을 못하게 하여 결행을 미루다가 함께 모의에 가담했던 사예김질의 밀고로 단종복위의 거사는 불발로 끝나고 성삼문 일가를 비롯한 사육신 등 무수한 인재들이 극형과 참화를 당하게 되었다. 성삼문은 세조가 고문을 할 때 나으리라고 부르자 세조는 네가 나의 녹(綠)을 먹었거늘 어찌 나으리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나는 단종의 신하일뿐 그대의 신하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준 녹은 한톨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 집에가서 보라고 대답하매 그의 집에 가서보니 세조에게서 받은 곡식은 고스란히 쌓여있어 화가 난 세조가 쇠를 불에 달구어 그의 팔과 다리에 화형을 가했지만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라 하며 신숙주를 향하여 너는 세종의 당부를 잊었느냐고 꾸짖으니 세조는 신숙주를 피하게 하고 형장으로 끌려 가면서 시를 남기는데! 목숨 재촉하는 북 울리는구나 돌아보니 해는 지고 있는데 오늘은 누구집에서 자거나 또한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낙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 하리라. 일편단심 그의 죽음과 함께 아버지 승과 삼촌 승(勝) 아우 삼빈, 삼고, 삼성, 아들 맹첨, 맹년, 맹종등 어린아이까지 모두 살해되어 멸문되었다. 할아버지 묘는 고향인 파주시 천현면 금곡리 개묵동 위 파평산 남맥 각모봉 중턱에 모시었고 당진에 살 고 있는 삼빈의 후손만이 수호관리 하고 있으며 숙부 승(勝)과 삼빈의 단이 할아버지 묘전에 설단 아버지 승과 부인 묘는 노은단 뒷산에 고히 잠들고 노량진 뒷산 언덕에 사육신묘는 대학자(생육신)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선생이 사육을 사형 한강에 던진 시체를 수습하매 만년에도 썩지 않을 충절로 살게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설화] 용바위(龍岩)와 황희(黃喜)정승의 출생설화

 금천군 토산면(구 장단군 귀산현) 향정리 정자동 (金川郡 兎山面(舊長湍郡鬼山縣)香亭里 亭子洞) 북쪽 구연천변(九淵川邊)에 우뚝 서있는 약40자 높이의 용바위는 그림에서 보는 용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용의 귀가 좌우로 두 개가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임진왜란때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심상치 않다 하여 활을 쏘아 왼쪽 귀를 부러뜨리고 지금은 오른쪽 귀만 남아있다. 그 형태는 용이 배꼽을 드러내고 일어서 있는 모양이며 배꼽에는 구멍이 나 있어 돌을 힘껏 던지면 구멍에 넣을 수가 있다. 돌이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사람들이 돌을 던져본다. 고서(古書)에는 용암(龍岩)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 주민들은 우리말로 용바위라고 일컬어오고 있다. 이 용의 배꼽은 절반쯤 흰색이 목 있는 곳으로 더 올라가게 되면 나라에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 용바위에서 남쪽으로 300m가량 가면 개자리(방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황희정승이 태어날 적에 구연폭포가 일시 말랐다가 흘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분이 성장하여 호(號)를 방촌(尨村)이라 했음은 자신이 태어난 동리이름을 아호(雅號)로 삼은 것이 분명하다. 이 개자리마을에는 지금으로부터 600여년전 황씨(黃氏)가 살고 있었는데 혈육이 없어 부인이 자식하나 점지해 달라고 용바위 밑에서 석달 열흘 백일정성을 드렸더니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아홉달만에 남자아기를 출산하니 용바위에서 백마우는 소리가 세 번 크게 울렸다 한다. 어머니는 아기가 자라서 크게 될 것을 알고 고이고이 길러 글공부를 시키니 두뇌명석하여 글공부는 물론 의견도 출중했다. 용바위폭포 앞에는 나무들이 묵고 또 묵어서 항아리 엎어놓은 것 같으며 아이들 팔뚝만한 나무줄기에 새끼줄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매고 흰 창호지를 여러 곳에 끼어 매고 정성드리러 오는 부인들이 돌을 하나씩 하나씩 갖다가 쌓은 것이 큰 집더미만한 성황당을 이루고 있다. 이 아기는 예상했던 대로 큰 인물이 되어 근세조선 창세에 모든 정사를 새롭게 한 명정승으로 호는 방촌(尨村)이며 이름은 희(喜)라 이분은 고려조에 벼슬길에 오리기 시작하여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근세조선을 개창(開創)한 후에 조정에 나와 국초(國初)에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 크게 성공시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이성계는 나라를 세웠으나 인재가 없어 국정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고려왕조의 충신들은 두 군왕(君王)을 섬길 수 없다하여 역사에 기록된바와 같이 72人의 전직 고위관리(高位官吏)가 구이면 관문리 두문동에 은거생활을 계속하고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성계는 할 수 없이 두문동(두무골)에 찾아가 협조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전원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72人은 이성계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71人이 의논하여 黃정승만을 內洞으로 나가 이성계를 도울 것을 결의하여 黃정승만이 조선조 창건에 참여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황정승은 태조로부터 4대임금 세정에 이르기까지 장장 60여년간 조정의 모든 요직을 거치는 동안 24년간 재상의 권좌에서 덕행과 선정으로 일관 이조창건의 국기를 다지고 기강을 세우는데 온갖 힘을 다하였다. 특히 청렴결백하기로 유명한 분으로 재상(宰相)의 신분임에도 그의 사저(私邸)는 지붕에 비가 샜고 몸에 걸친 옷은 항상 폐포(廢布)였다고 한다. 세종조의 청백리(淸白吏)로 綠選되었다. 그러나 좌의정(左議政)으로 있을 당시 감옥살이를 하던 태석균(太石均)을 옹호 사면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고 교하현감으로 유배되자 문산읍 사목리(임진강변)에 자그마한 정자( 河亭)를 건립 낙향하게 되었으니 항상 갈매기와 벗삼아 강변을 거닐면서 명상에 잠겨 나라걱정과 더불어 낚시와 시회를 즐기었다. 1년만에 다시 복관되니 반구정으로 개칭하고 자주 오르내리면서 87세 정승직을 물러나 이곳에서 여생을 마치었다. 지금 이곳에는 후손들이 정자와 앙지대, 영묘, 제실등을 설치하였으며 가까운 금승리에 그의 분묘가 있다. 물질만능으로 가치관이 혼돈된 오늘날 우리는 황정승의 높은 인격과 청백리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겨 추앙(推仰)하고저 서기 1979년 5월 그의 자손들과 뜻 있는 사회문화인들의 추진으로 반구정 앞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지난날 고향에서 당장이라도 하늘을 나를 듯한 용바위의 웅자(雄姿)를 바라보고 개자리마을(尨村洞)을 생각할 때 "과연 그 정기에 그 인물이구나" 하고 용바위와 황정승을 묶어 생각해 보았지만 이제는 한갖 망향의 시름일 뿐 가볼 수가 없다. 용바위가 황정승의 옛터라고 함은 고노(古老)의 구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장수황씨세보 상세사나 황씨가선묘에 관한 실록(芝川公文集)에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토산용암(兎山龍岩)은 익성공(翼成公) 황정승의 구기(舊基)" 라 했고 "중국사자는 이 형태의 기이하고 웅장함을 보고 중원에도 이렇게 기이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반드시 대현인(大賢人)이 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용암을 찬양한 한시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석고삼장약장비(石高三丈躍將飛) 높이 솟아있는 돌은 나를 듯 뛸 듯  일하체승공앙수자(一體勝空仰首姿) 한 덩어리로 허공에 솟아 머리들고 있네  천하약무차기이(天下若無此奇異) 천하에 이처럼 기이한 곳이 없을 진데  기종인물문타수(氣種人物問他誰) 어찌 정기 가득찬 인물이 아니 날거냐 그리고 용바위와 대치되고 있는 마유현(馬踰峴 : 마내피와 움밀사이)하에 고지(古址)가 많이 있으며 귀래동(歸來洞 : 고서에는, 龜來洞)에는 동향에 구능(丘陵)이 있는데 그곳에는 고총(古塚)이 많이 있고 황정승가의 선산이 그 중에 있다 했으며 그 산지에서 단비(斷碑)가 출토됐는데 "黃公石富" 라 명기되었다하니 이 고장에 구전되는 바와 황씨 가선묘기 내용이 일치되는 점으로 보아 용바위를 중심한 곳이 황정승과 그 선대의 구지(舊址)임을 재고증 할 수 있다.   

질문[설화] 이원수와 신사임당 실기의 설화

  ◇활인수(活人樹)의 유래◇감찰공(監察公)이원수(李元秀)는 강직(剛直)하고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녹발홍안(綠發紅顔)의 청춘시대에 일찌기 강원도 강릉(江原道 江陵)에 찰방(察防)으로 있을 당시 장가를 들었으니 그 부인은 당시 명사(名士)로 경향에 이름이 쟁쟁하던 진사 신명화( 進士 申命和)의 귀동 따님었다. 신(申)부인은 그 아버지 신진사의 고결한 피를 받고 산수좋은 강릉에서 생장하니 만큼 인물이 비범하고 천재가 비상하여 어려서부터 시문서화(詩文書畵)가 모두 절특하니 세상 사람들이 신녀(神女)라고 칭찬하고 자기는 또 옛날 주문왕(周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호(字號)를 사임당(師任堂)이라 하였다. 그러한 재원(才媛)과 재자(才子)가 서로 혼인을 하게 되니 그 외모와 덕행이며 재예가 피차 막상막하한 것은 물론이고 금슬(琴瑟)이 또한 남다르게 좋으니 그야말로 녹수의 원앙(綠水鴛鴦)과 단산의 봉황(丹山鳳凰)이 서로 짝을 만난것 같아서 보는 사람마다 그들 부부는 천정의 배필이라고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보통의 청춘남녀 같으면 그렇게 다정스럽고 재미있는 신혼부부가 서로 헤어짐을 싫어하여 겨울밤과 여름낮은 그 기나긴 시간도 지루한 것을 조금도 느끼지 않고 한날 한시 같이 금슬의 낙(琴瑟之樂)으로만 만족한 생활을 하겠지만 그들 부부는 모두 인격이 상당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인 까닭에 구구하게 일시적인 환락(歡樂)에만 만족하지 않고 좀더 인격을 수양하고 좀더 학문을 연구하여서 장래 한 사회 또는 한 나라의 큰 인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혼인한지 약 오년이 지나서 어느 날 밤에 서로 의논하되 『우리 부부가 젊은 정리에 서로 떨어져 있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한집에만 그대로 같이 있게 된다면 공부에 큰 방해가 되고 따라서 장래 발전에도 영향이 퍽 많을 터이니 아무리 애정을 못 잊을지라고도 서로 십년작정을 하고 각각 떨어져서 남편된 나는 서울에 가서 글 공부를 하고 부인된 당신은 집에서 그림공부를 하되 그 기한이 되기전까지는 서로가 단 한번이라도 내왕(來往)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신까지도 일체 하지 말자』하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아침에 원수는 그 약속을 단연 실행하려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사랑하는 부인과 이별하고 서울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원수가 처음에는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공명심이 많아서 가정의 재미와 부인의 애정도 모두 돌보지 않고 그 부인과 그렇게 굳은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지만 얼마 안가서 평소에 그 부인과 서로 사랑하던 생각을 하고 또 앞으로 장차 십년이 되도록 피차 얼굴 한번도 못보며 편지 한 장도 못할 생각을 하니 앞길이 캄캄해지고 가던 발길이 저절로 돌아서져서 대관령(大關嶺)마루턱까지 갔다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하기를 이틀 동안을 계속하다가 사흘째에는 남 보기에도 너무도 부끄러워 집 근처 대밭(竹林)속에 와서 있다가 밤중에 남 모르게 담을 넘어서 그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부인도 처음에는 그 남편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속으로 남자의 의지가 너무 박약 한것을 비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대하여 그렇게 사랑하는데 마음에 흔들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하는 동정만 보았으나 며칠을 계속하여 그렇게 하고 더구나 밤중에 담을 넘어서 들어오기까지 하는 것은 집안사람 보기에 창피도 하려니와 처음 약속과 상반이 되므로 고정(高貞)한 그 부인으로서는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수가 방문 밖에 와서 여러 번 문을 열어 달라고 간청하여도 절대로 열어 주지 않고 마지막에는 가위로 자기 머리털을 선뜩 잘라서 문밖으로 내어주며 『사람이란 것은 비단 부부간이라도 한번 약속을 한 이상에는 그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까짓 구구한 애정을 이기지 못해서 신의를 지키지 못한다면 피차에 어찌 신봉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나의 인격보다도 나의 외모를 더 사랑하시는 까닭에 그리하시는 것이니 나의 외모의 한부분되는 머리털을 아주 잘라서 드리는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셔서 십년동안 최초의 약속과 같이 잘 지키셔서 성공을 하시고 다시는 우리 집에 오시지 마십시오. 만일 이후에도 또 약속을 지키시지 않으신다면 그때에는 아주 내목을 베어서 최초의 약속을 지킬뿐입니다.』 하고 말하니, 원수는 깜짝 놀라 후회하며 그 부인에게 사과를 하고 그날 밤으로 다시 담을 넘어서 서울로 간 후에는 처음 약속과 같이 십년 동안이나 한번도 되돌아 다시 가지 않고 글 공부를 하고, 신씨부인은 집에서 또 그림공부를 하되 특히 안견의 산수도(安堅 山水圖)와 포도(葡萄) 초충등을 전공하여 그 화법이 모두 신경(神境)에 이르렀다. 원수가 그렇게 공부를 하는 동안에 빠른 세월은 어느 덧 벌써 십년이 되어 약속한 기한이 되었다. 웬만한 남자같으면 그 피가 끓고 기운이 용솟음칠듯한 청춘시절에 객지에서 십년동안이나 홀애비 생활을 한다면 그 번화하고 유혹 많은 서울장안에서 반드시 화류장 같은 곳에 몇 번 발을 들여놓거나 그렇지 않으면 하다못해 남의 집 행랑방 출입이라도 더러 하였겠지마는 원수는 원래 강직 고결한데다가 더구나 그 부인이 자기를 위하여 그 생명같이 사랑하는 머리털까지 자르던 일에 깊은 감동이 생겨서 십년 동안을 한날 한시 그 절조를 지키고 열심히 공부만 하였다. 그러다가 기한이 차게 되니 원수의 그 기쁨은 마치 십년 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석방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단 몇날도 지체하지 않고 만기가 되던 바로 그 이튿날에 서울을 떠나서 강릉(江陵)으로 가게 되었다. 지금 같으면 길도 좋고 자동차나 동해선의 기차 같은 것이 있어서 소위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으로 당일에 강릉을 갔겠지만 그때만 하여도 서울에서 강릉을 걸어가자면 거리가 워낙 멀어서 날짜도 여러날 걸리려니와 하늘이 잘 보이지 않도록 산림이 우거진 태산준령에 백주에도 화적(火賊)강도와 맹수(猛獸)들이 곳곳에 나타나서 웬간한 사람으로는 혼자서 길을 갈 엄두도 못내고 동행을 몇 사람씩 얻어야만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원수는 원래 대담한 남자인데다가 십년이나 서로 떨어져 있던 사랑하는 그 부인을 만나 보려는 정열이 타오르는 까닭에 태산준령도 평지같이 보이고 화적과 맹수도 우습게 생각되어 같은 동행도 없고 또 신변에는 몸을 보호하는 칼이나 창 같은 것도 없이 그냥 한사과객(寒士過客)의 행장과 같이 죽장망혜 단표자(竹杖芒鞋 單瓢子)에 개나리 봇짐을 해 걸머지고 좌청산(左靑山) 우록수(右綠水)에 양장구곡(羊腸九曲)같이 구비구비 뚫린 길을 유람겸 탐험겸 천천히 걸어갔다. 때는 마침 양춘가절이라 곳곳마다 기암 절벽에 두견 철쭉이 만발하여 금수(錦繡)의 세계를 이루고 나무마다 이상한 새가 노래하고 다람쥐들은 굿을 하며 춘흥(春興)을 돋우어 녹의홍상 산골 처녀들이 산으로 들로 헤어져서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나물을 뜯으며 강원도의 독특한 애조로 『형님 형님 사촌형님 시집 살이 어떱디까. 시집살이 삼년만에 삼밭같은 이내 머리 다복쑥이 되었네.』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또 천장만자 되는 높은산 절벽에서 화전농부(火田農夫)가 화전을 가느라고 역시 강원도의 긴 가락을 노랫조로 『어녀...... 어치돌지나마, 마라 한눈팔지 말고 잘 가거라 어-이놈의 소(牛)』하고 적막한 푸른산이 울리도록 처량하게 내는 소리, 그 노래를 들을 때는 시흥(時興)이 저절로 나서 다리 아픈 것과 몸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몇십수의 즉흥시를 지으면서 저절로 길을 걷게 되었다. 원수는 그렇게 길을 가는 것이 며칠이나 걸었던지 이럭저럭 강릉 땅의 대화(大和-지금은 평창(平昌)땅)까지 이르렀다. 이 대화라는 곳은 비록 산협(山挾)이지만 옛부터 큰 주막(酒幕)거리로 유명하여 인가가 즐비하고 비교적 물색이 좋았었다. 원수가 급히 그 부인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으로 단 한시간이 라도 더 가고 싶었지만 그곳에 당도하고 보니 벌써 해가 저물었을뿐 아니라 여러날 행로에 몸도 피곤하고 중로에는 대관령(大關嶺)이란 유명한 큰령이 앞을 막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불가불 하룻밤을 쉬어 가야만 되게 되었다. 주막거리로 들어가서 아무집이나 깨끗한 집이 있으면 하룻밤을 자려고 한집 건너고 두집을 건너서 두루두루 정한 집을 찾는 중에 한집 문 앞을 지나려니까 소복을 입은 한 여자가 나오며 『저 손님 어디로 가시는 손님이신지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우리 집에서 하룻밤 쉬어 가십시오. 집은 비록 적고 누추하지만 식구도 단촐하여 조용합니다.』하고 말하였다. 원수는 그 여자를 한번 힐끗 쳐다보니 나이는 약 이십 오륙세 가량 되어 보이는데 비록 산촌 주막에 있는 여자이지만 얼굴도 제법 숭글숭글하고 잘 생기고 의복도 소복을 입은 것이 수수해 보이며 말씨도 또한 정다웠다. 원수는 주인만 보아도 그 집이 과히 흉하지 않는 주막으로 짐작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동가홍상(同價紅裳)이라고 이왕이면 주인 여자가 좋은 집에서 하룻밤 자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그 여자를 따라서 갔다. 그 여자는 원수를 언제 친하였다는 듯이 특별히 친절하게 대접하여 방도 보통의 보행객을 재우는 길가 방을 주지 않고 안 건너방으로 정해주고 이부자리도 새것으로 갈아 주며 음식 범절도 특별히 지성껏 잘하여 주었다.원수는 시장한 판에 저녁밥을 잘먹고 피곤한 다리를 쉬며 한잠을 잘 잤다. 시간으로 치면 자정이 훨씬 지나 새로 한시쯤이나될까 말까 할 때에 목이 말라서 머리맡에 있는 물을 먹고 다시 누워 있으려니까 별안간 안방문이 바시시 열리며 주인 여자가 소복단장에다 주안상을 차려가지고 자기방으로 들어오며 『손님 주무십니까? 곤하시게 주무시는데 여자가 이렇게 방에까지 들어오는 것은 미안하고 황송합니다만 집에 마침 변변치 않는 술과 안주가 있기에 잡수시고 먼 나그네길의 피로를 푸시라고 가져 왔습니다.』한다. 원수도 초저녁에는 몸이 곤해서 정신을 모르고 잤지만 한잠 자고나니 잠이 잘 아니와서 갑갑하던 차에 밉지않은 안주인이 친절하게 손수 술상까지 가지고와서 술을 먹으라고 하니 여간 고맙게 생각되지를 않고 평소에는 잘 못 먹는 술이나마 열서너잔을 받아 먹고 주인 여자에게도 원수가 또한 몇잔을 권해서 남녀주객이 모두 허물없이 말하기 좋을 정도로 얼큰히 취했다. 주인 여자는 원래에 마음속에 간직한 일이 있기 때문에 먼저 원수에게 말을 건네었다. 『손님이 보시는 바와같이 저는 지금 상중이올시다. 본래는 정선(旌善)사람으로 이 집에 출가하여 집이 가난한 탓으로 부부가 주막영업을 하며 그날 그날을 지냈으나 박명(薄命)한 탓으로 금년 봄에 불행히 남편을 여의고 지금 독신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청상과부로 있어서 날마다 여러 남자 손님을 대하면서도 이때까지 다른 생각이라고는 없더니 오늘 우연히 손님을 뵈오니 처음부터 호감이 생겨서 여자로서의 체면과 염치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어온 것이니 과히 추하게 생각지 마시고 하룻밤의 가연(佳緣)을 맺어 주시길 바랍니다.』 다른 남자 같으면 그런 경우를 당해서 누구나 그 여자의 소청을 들어줄 뿐 아니라 먼저 자진하여서도 수작을 걸겠지마는 이원수는 원래 고결하기로 유명한 사람인 까닭에 처음에 그 여자가 그렇게 고맙게 구는 것을 보고는 퍽 감사하게 생각하였으나 다시 그런말을 듣고 나니 여러 가지가 모두 더럽게 생각되고 더군다나 그 여자가 막중한 자기 남편의 몽상을 하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너무도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처음 그런 말을 할 적에는 그냥 온순한 말로 거절하다가 재삼 간청을 할 때에는 아주 정색을 하여 꾸짖어 말하고 최후에는 그런 말을 또 한다면 밤중에라도 그 집에 있지 않고 길을 떠나가겠다고까지 하니 주인 여자도 그제서는 하는 수 없이 크게 긴 한숨을 한번 쉬며 탄식하고 말하되 『사람의 운명이란 할 수 없다. 원래에 내 팔자가 기박하니 어찌 할 수 있으랴.』하고 다시 원수에게 너무 실례하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초연한 안색으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한다. 원수는 그 여자를 돌려보낸 뒤에 혼자 생각에 그 여자가 보복으로 또 무슨 흉계나 꾸미지 않나 하고 무서운 생각이 나서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이 말똥말똥하여 밤을 새우고 이튿날 첫 새벽에 무슨 죄나 짓고 달아나듯이 그 집을 떠나서 자기 처가로 갔다. 사랑하는 부부가 햇수로 꼭 십년만에 서로 만나게 되니 그 반가움이야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더구나 두 부부가 그간에 모두 독실한 공부를 하여 피차 괄목상대를 하게되니 보통의 다른 부부가 여러 해 떨어져 있다가 만나는 것보다 더 한층 반가웠다. 그럭저럭 며칠을 지내는 중에 하룻밤에는 그 부인이 꿈에 큰대들보같은 흑용(黑龍)이 자기 방으로 들어 오더니 어린 아이를 품속에다 안겨 주었다. 그 부인은 그 꿈을 꾸고는 그날부터 태기(胎氣)가 있었다. 그 뒤 얼마 아니하여 원수는 과거(科擧)를 보려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었다. 대화 근처에 또 이르니 전날에 자던 주막 생각이 문득 났다. 원수는 전날에 그 집 여자에게 너무나 인정없이 대한 것이 후회되었다. 혼자서 다시 뒤미쳐 생각하기를 『소위 남자로 태어나서 여자의 그만 한 소청도 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몰인정하고 졸장부의 일이니 이번에는 일부러 그집에가서 그 여자에게 지난날에 있어서의 미안한점을 사과하고 한번 호원을 풀어 주어야만 되겠다.』하고 다시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여자는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친절하게 원수에게 대해 주었다. 그 날 밤에는 원수가 그 여자를 자기 방으로 청하여 오게 하고 지난날의 미안하였다는 말을 한 다음에 그날 밤에 같이 재미있게 지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전날과 아주 태도가 달라지며 엄연히 정색을 하고 말하되 『내가 비록 삼로 가상에서 주막질을 해먹을 망정 그런 말분(末分)의 여자는 아닙니다. 내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길가에서 오고 가는 사람을 많이 보는 관계로 남의 기색을 대강 살필 줄 알아서 전날에 당신의 얼굴을 살펴본 즉 그런 귀한 사람을 한번 낳아볼까 하는 욕심에서 여자로서 부끄러움과 창피한것을 무릅쓰고 그런 말씀을 하였으나 지금은 벌써 당신 부인의 몸에 귀한 아드님이 잉태되어 있사온데 내가 공연히 당신에게 정조만 더럽힐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딱 잘라서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그러나 한가지 아까운 일은 그 아이가 앞으로 출생할 때에 반드시 인시(寅時)에 낳게 되므로 일곱살 밖에 안되어서 호환(虎患)에 죽게 될터이니 그것이 걱정이 올시다.』 하니 원수는 그제야 그 여자가 보통의 여자가 아닌 줄알고 깜짝 놀라며 오늘까지의 잘못된 점을 사과하고 다시 그 아들이 어떻게 하면 난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처음에 아무 말도 없더니 원수가 하도 지성스럽게 물으니까 그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열면서 『속담에 말하기를 적덕(積德)한 사람의 자손은 담장밑에도 서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당신도 오늘부터라도 덕을 많이 쌓아올린다면 그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요. 그런데 덕을 쌓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남의 생명을 천명가량 살려야 하겠는데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 사람 대신 즉 남의 집 신주(神主)가 되어 대대로 자손계승(子孫繼承)을 시키는 밤나무를 천주(千株)만 심으면 그 화를 면할 수 있는데 그것도 특별히 주의하여 그 아이가 일곱살 되는 모월 모일에 그 아이를 절대로 밖에 내보내지 말고 방속에다 깊이 숨기고, 또 늙은 중이 와서 그 아이를 보자 하거든 또 절대로 면회를 시키지 말고, 나도 많은 덕을 쌓은 사람인즉 내아들은 함부로 잡아 가지 못한다고 그 밤나무를 보이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니 원수는 그의 말에 다시금 크게 놀라고 감탄하여 서울 가던 일도 중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그 부인에게 전후 사연을 말하고 그때부터 고향인 화석정 앞집 주위 근처에다 밤나무 심기에 힘써서 불과 일년에 약 천주가 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십이월 이십 육일 인시(中宗三十年丙申)에 과연 신분인이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곧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대학자요 대정치가인 이율곡 선생(李栗谷 先生)이었다. 원수는 그를 낳은 때가 그 여자의 말과 같이 호랑이 때(寅時)인데 더욱 놀라고 신기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밤나무를 키우는데 주의를 하였다. 율곡이 다섯 살이 되던해 모월 모일이었다. 원수 부부는 그 여자의 말과 같이 그날에는 특별한 주의를 하여 첫 새벽부터 율곡을 안방 한구석에다 깊이 깊이 가두어 두고 방문까지 잔뜩 걸어닫은 뒤에 그 동네에 있는 젊은 청년들을 모아다가 특별히 지키게하고 원수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사랑에 앉아서 향을 피우고 주역(周易)을 낭독하면서 그 시간이 돌아 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아니 있었더니 과연 백발이 성성한 늙은 중(僧) 하나가 갈포장삼에 굴갓을 쓰고 대문 밖에 와서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 마하살 무상심심 미묘법 백천만겁난재위』 하고 염불을 하며 동냥을 청하였다. 대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은 『안에는 아무도 안계시니 사랑으로 가보시오』 하고 말하였더니 그 노승은 다시 사랑으로 와서 원수에게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하며 자기는 금강산 유점사중으로 시주를 받으러 왔다하며 『주인 아기는 어디 갔습니까?』 하고 묻는다. 원수는 그 중의 말을 듣고 크게 소리를 치며 호령을 하되 『네가 어찌 나를 속이느냐. 나도 적덕을 많이 하였는데 어찌하여 내 자식을 해치려고 하느냐. 내 자식은 감히 해치지 못할 것이다.』하니 그 노승은 조금도 무서워 하는 기색이 없이 또 말하되 『댁에서 무슨 적덕을 하였소?』 하고 반문을 하였다. 원수는 밤나무 천주를 심은 것을 말하였더니 노승은 조금도 곧이 듣지 않아 원수가 그 노승을 데리고 집 뒷산으로 가서 그 밤나무를 보였더니 노승은 또 수요가 과연 맞는가 하고 하나하나 세어 보자고 하면서 원수와 같이 나무를 세게 되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스물 서른 마흔...... 백 이백 삼백 사백 이렇게 세어서 구백 아흔 아홉까지는 수가 틀림없이 맞았으나 천번째 되는 한 나무가 마침 소(牛)를 매었던 까닭으로 소에게 촉상(觸傷)이 되어 말라 죽고 수에 차지 못하였다. 그 노승은 돌연 변색을 하고 원수를 돌아보며 책망을 하되 당신같은 정직한 사람도 거짓말을 하여 천명(天命)을 거역하려느냐 하고 아이를 또 급히 내놓으라고 하니 그 때에는 아무리 대담한 원수라도 용기가 없어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였다. 그런 던 차에 이상하게도 별안간에 어떤 나무 하나가 말을 하며 『나도 밤나무』 라며 나서서 천주를 채우니 노승도 그제서는 어찌 할 수 없었던지 크게 소리를 한번 지르더니 다시 큰 호랑이로 화해서 도망을 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율곡 선생은 그 화를 면하고 잘 자라서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는데 고향에는 지금도 밤나무와 비슷한 『나도 밤나무』란 나무가 있는데 그때에 그 나무가 이율곡 선생을 살려냈기 때문에 일명을 활인수(活人樹)라고 하고, 동리 명칭도 율곡리로 하였으며 선생의 호도 율곡(栗谷)이라 호칭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설화] 천제와 산신제유적의 설화

우리나라는 조선조 개창이후 경관이 아름다운 명산이나 대천에서 전쟁과 천재지변을 막고자 하는 산신제와 올바른 정치와 성군을 추모하는 사직단(社稷壇)을 설립 종묘사직을 수호하기 위한 제사를 지내왔다. 이에 따라 각 고을 단위에서도 관내 명산을 선택 국사봉(國詞峯)을 지정 그 지역 천재지변을 막고자 하는 천제를 지냈는데 우리고장 파주목은 월롱 아가산에 국사봉과 교하군에 교하 월롱산(기간봉)에 국사봉 적성현에는 감악산 서북내령 식현리 뒷산의 국사봉에서 제사를 지냈다.  각 고을 안녕질서를 기원하는 성황당(城隍堂)을 설치 성황제와 괘질을 막기위한 여단을 유치 제사를 지냈으며 각 부락에서도 매년 10월달 뒷산에 산신대(山神臺)를 설치 부락 총회에서 산신제일을 책정했다, 제사전일 가가호호 돈과 쌀 1돼씩을 거출하고 주관하는 독아집을 선정 산신제사일에는 일찍 일어나 전부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부락 출입구마다 새끼줄을 느려놓고 낯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경비를 하였다. 한편 부락공동 우물을 깨끗하게 치고 주위를 정화한 후 밤 12시에 삼색과 시루떡을 차리고 연노하신 분을 제관으로 모시고 제단에 올라 제사를 지내면서 집집마다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게 된다. 이러한 미풍양속을 부락 주민들의 친목과 융화 그리고 사랑을 베풀기 위한 행사로서 마을마다 거의 실천 유래되었으나 오늘날 우리관내에서는 몇 개소만 유지하고 있을뿐 거의 사라져 안타까운 실정이다. 

질문[설화] 철조대왕 행궁경숙의 설화

철조대왕은 즉위 후 서기 1850년 3월 임인일(壬寅日) 판의금부사 이가우(李嘉愚 )와 전라도 병마절도사 채학영(蔡學永)을 대동 파주, 교하에서 3일간 경숙(經宿) 하면서 교하주민 남녀 61세 이상 고령자에게 쌀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고 용성부대 부인(龍城府大夫人) 묘소를 전배(展拜)한 후 환궁하였다. 익년 3월 신축(辛丑)일 에는 형조판서 윤치겸(尹致謙)과 한성부윤 홍재철(洪在喆)을 대동 궁하행궁 경숙 을 하였으며 익일(翌日) 인능친제(仁陵親祭)와 장능전갈(長陵展葛)을 한 후 은 언군(恩彦君)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정양부 대부인(定陽府大夫人) 용성부대인 (龍城府大人) 묘소를 전배하고 환궁하였다. 서기 1855년 3월 기유(己酉)일에는 파주와 교하를 두루 행궁 경숙하면서 경술(庚戌)일 순조(純祖) 인능친제(仁陵親 祭)와 장능전배를 하는 등 3차에 걸쳐 행궁하였으며 교하는 양능침(兩陵寢)을 봉호(奉護)함에 있어 역민자다(役民自多)함으로 성향모(城餉耗)를 제감(除減) 하도록 하명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다음 시를 남기었다 한다.바람은 신선하고 날씨 좋은데 백성들은 가을걷이 한참이구나 파주행궁 하룻밤 편히 쉬는데 노래가락 즐거움이 들려오느니   

질문[설화] 검단사(黔丹寺)의 유적에 얽힌 설화

서기 847년(신라 문성왕 9)에 黔丹道師(眞監國師 慧照) 또는 얼굴이 검어 黑頭 라고 별호가 있던 대승이 사자를 명하여 천왕봉하(현 탄현면 법흥리 산78) 약산동 후산 중턱에 사찰을 창건 黔丹寺로 명칭하고 강화 전등사를 자주 왕래하면서 불씨를 구해왔다 한다. 1731년(조선 영조7)에 장릉(인조대왕)을 운천리에서 천 봉할 때 송리산 중턱으로 이전하고 장릉 제향시 제수중 두부(豆腐)를 만들어 제 공하였다 하여 豆拘寺라고도 칭하였다 한다.  검단사에 있는 석불은 검단도사의 작품이라 전해지며 이 석불은 등신좌상(等身坐像)으로 1,000여년의 세월이 흐 르는 동안 노천에서 있던 것을 일제시대 때 금산리 보현암으로 이전 보존되고 있다하며 검단사에는 높이 3자의 금부처가 있었으나 황해도 개풍군 죽면에 사는 해적들이 훔쳐 팔아 먹으려 하였다가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팔지 못하고 도로 반환하였다 한다. 그 동안 여러 대사가 번갈아 조계종에서 드나들었으며 국난 으로 회진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되었으며 박법혜 주지스님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오래된 사찰이다.    

질문[설화] 구봉(龜峯)선생 유적의 설화

구봉 선생의 명은 익필(翼弼),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또는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礪山), 사련(祀連)의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현 파주시 교하면 산 남리 심악산하 궁동에서 생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되 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동생 운곡 송한필(雲谷宋翰弼)도 문학에 이름이 높 아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알만한 사람은 오직 익필과 한필 형제 뿐이라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등과 사우교제하면서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 (禮學)과 문장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 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사람 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한다. 당시 현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 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중 김장생, 김 집, 정 엽, 서 성, 정홍명, 김 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다.  1599년(선조 32) 임진왜란이 끝난 2년후 「구봉집 을 남기고 66세로 죽게 되니 선조대왕께서는 지평으로 추증하는 한편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를 내리시었다 한다. 부친 송사련(宋祀連)은 1496(연산 군 2)-1575년(선조 8) 甘丁 아들 안돈후(安敦厚)의 서녀(庶女)와 혼인 안처겸(安處 謙)의 서고종(庶姑從) 미천한 가문출신으로 벼슬할 기회를 살피다가 안당(安塘)과 사이가 좋지않던 권 신, 심 정(權 臣, 沈 貞)에게 아부 관상판관(觀象判官)이 되었 다. 1521년(중종 16) 처 조카인 정 상과 공모 안 당, 안처겸, 권신(安 塘, 安 處謙, 權臣)등이 심정, 남곤(南 袞)등의 대신을 제거하려 한다고 무고로 밀고 신사 무옥(辛己誣獄) 사건을 일으켜 안당, 안처겸 등 안씨 일문과 많은 사람에게 화를 입히고 자신은 그 공으로 당상에 올라 30여년간 세력을 잡았다. 죽은 후 1586년 (선조 19) 안처겸 등이 무죄로 밝혀져 관직이 삭탈되었다. 구봉선생은 천자(天姿) 가 투철하고 눈동자가 겹쳐 찬란한 빛이 있어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율곡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사람됨과 능력이 특출하여 장차 나라의 큰 동량이 됨 을 알고 선조대왕에게 구봉선생의 행적을 아뢰니 즉시 입궐케하라 하시여 율곡은 밤중에 구봉을 불러들였다. 어전에 부복한 후 임금이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였더 니 좀 가까이 와서 얼굴을 들라하시었다. 그러나 구봉은 “소신에게는 안인지기(眼 引之氣)가 있어 성상께서 놀래실까봐 두렵습니다.”하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니 짐 을 보라 하시어 임금을 주시하는 동안 눈에서 호랑이 눈과 같이 불빛이 번쩍이자 대왕은 놀라 넋을 잃고 오랫동안 아무런 분부가 없자 담담히 소신은 물러갑니다 하고 대궐을 나왔다 한다. 그후 선생님은 학문을 닦고 후진양성을 낙으로 삼으며 시를 지은 뒤 한 구절 중에서 진영조무성(盡永鳥無聲) 날이 저무니 새소리가 없고 우여산갱청(雨餘山更靑) 비온 뒤 산은 더욱 푸르도다 사희지도태(事稀知道泰) 사소한 일에도 도의 크기를 알고 거정각심명(居靜覺心明) 고요한 삶은 마음 밝음을 깨닫도다 일오천화정(日午千花正) 해 솟은 대낮에도 많은 꽃이 피고 지청만상형(池晴萬象形) 맑은 연못에는 만상이 나타나는구나 종래언어잔(從來言語淺) 끝내 말이 없으니 묵식차간정(默識此間情) 잠잠한 사이에 정을 알게 되었네 구봉선생의 이기설은 율곡선생과 일치하며 未動은 性이요 己動은 情인고로 미동 과 이동은 모두 心이니 性과 情을 종합한 것이다. 이것을 물에 비유한다면 심은 물 과 같고 성은 물의 고요함과 같으며 정은 물의 파동과 같다 하시었다. 심, 정, 성의 상호관계를 요령있게 비유한 고견이며 이순신에게 병법을 가르칠 때 아래 시를 유념하도록 하였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 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전우야순도(戰于夜循道) 전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또한 심심 당부하기를 “독룡이 숨어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으리라(毒龍潛處水偏靑)” 하니 이러한 일곱자 글귀를 이순신 장군은 잊지 않고 잘 이용하였다 한다. 구봉선생이 돌아가 신 뒤 어느 해 제자 가운데 제사에 참례하기 위해 시골서 올라오다 구리쇠나루를 건너 남대문쪽으로 걸어가다가 어떤 귀인의 행차를 만나 비켜서니 가마안에서 자 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보니 구봉선생께서 하시는 말이 “자네 좀 늦었네 난 길이 바빠 그만가네.” 하며 “이것이나 받아주게나.” 하고 헌 붓 한자 루를 주길래 얼떨결에 공손히 받아들고 땀을 닦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하도 기이 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급히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보니 제사날들은 이미 이 틀전에 지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겪은 일을 여러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서 받은 붓을 보여주니 제주(祭主)하는 말이 그 붓이 틀림없는 선생이 쓰시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놀라면서 신기한 일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설화] 탑삭골 달걀귀신의 설화

조리면 봉일천에서 서북쪽으로 샛길을 따라 1km정도 걸어 들어가면 20여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도깨비 촌으로 탑삭골이라고 불 리어왔다. 옛날 이 탑삭골 능선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려던 젊은이가 있었다. 공 릉 장터에서 산 물건을 잔뜩 지게에 짊어지고 걷다보니 귀가시간이 늦어 버렸던 것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구나.”하며 젊은이는 투덜투덜 지껄이며 이 탑삭골 의 능선까지 걸어왔다. 눈앞에 울창한 숲속이 더욱 거무죽죽하게 보여 밤의 풍치 를 흠뻑 머금고 있는 듯했다. 젊은이는 눈동자를 굴렸다. 마을 노인들이 어렸을 때 부터 “난 달걀도깨비를 봤다네, 직접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뜨고 봤는걸.” 하며 그 내력을 이야기 해주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평소엔 담이 크다고 자부해 온 그였 건만 왠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분 나쁘리만치 시커먼 숲속은 조용했다. 벌레들 우는 소리마저 괴괴하여 정막만이 감돌아 흐를 뿐이었다. “에이-. 저 놈의 곳을 어 떻게 간담, 어서 빨리 가야 할텐데.” 혼자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걸었다. 어쩐 일인 지 이상하게도 걸음걸이가 빨라지지 않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음산한 숲 주위에 바람이 휘몰다가 멈추고 스르르 다시 불어 나뭇잎들을 건드렸다. “에이 빌어먹을 ” 젊은이 머리 속에는 달걀도깨비를 만나면 그에 홀려 밤새도록 고생하다 진흙탕 속에 빠져 죽어버렸다는 전설이 자꾸 머리속에 맴돌았다. 숲은 더욱 시커멓게 어 둠속으로 젖어 들었고 바람은 차츰 거세지기 시작했다. “솨-솨르르 솨아-스스륵” 여기 저기서 갈잎 나무들이 함성을 터뜨리며 가지를 흔들었다. 젊은이의 무서움 과 공포심은 갈수록 심해졌다.  시간은 자꾸 지나는데도 걸음은 황소처럼 느리기 만 한 것 같았다. 음산하게 가라앉은 주위가 점점 그의 몸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젊은이는 뛰었다. 무거운 지게를 자꾸 추수거리면서 쉬어갈 엄두도 못내고 헐레벌떡 뛰었 다. 목이 바짝바짝 탔다. 땀방울이 옷에 배어 후줄근하였다. 이상하다? 다른때는 이 탑삭골을 아무리 지나다녀도 오늘처럼 이렇게 걸음이 느린적이 없을뿐더러 별로 무서웠던 기억도 없는데 웬일일까? 요괴라도 나타나려는 기미인가? 의구심은 자꾸 젊은이를 괴롭혔다. ‘솨-소르르-솨악...’ 바 람이 불었다. 목을 움추리고 자라모양 살그머니 나무 위를 쳐다보고 앞으로 시선 을 돌렸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귀신들의 괴성이 허허거리고 들려올 것 만 같았 다. 바로 그때 젊은이는 시선을 못박은 채 꼼짝 할 수 없었다. 젊은이가 얼굴을 돌 린 저만치서 웬 사람들이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천천히 걸어서 이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하얀 옷을 입었는데 둘 다 노인인 듯 싶게 허리가 꼬부라져 보였다. 먼발치라 잘 분별하기가 힘들었으나 젊은이는 눈을 비비고 주시했다. 웬지 머리 끝이 쭈뼛했다. 탑삭골 능선을 거의 벗어날 무렵이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숲도 거 진 지난 셈이다. 땀이 쭉 흘렀다.조금만 더 가면 훤히 뚫린 들판이고 인가가 보일 것이다. 한편으론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사람을 만났다는 반가운 마음도 들어 걸 음을 빨리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앞에서 걸어오던 두 늙은이가 옆길로 새 서 탑삭골 숲속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 저 사람들은 겁도 없나? 저리가면 도깨비가 나타나서 사람을 홀린다는데...’ 젊은이는 꼬부랑 두 늙은이를 무턱대고 불렀다.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친 것이다. ‘여보시오! 두 분 네들 거기로 가면 죽어 요! 죽는다니까요!’ 그 목소리는 비명처럼 숲속을 길게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그 길은 도깨비가 나오는 길이랍니다. 빨리 나오세요! 몇 번이나 소릴 질렀는지 모른 다. 잠시 후 두 노인은 들었는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까이 오는 두 사람 옷차림으로 보아 한사람은 할머니인 걸로 봐서 양주가 아닌가 했다. ‘어 디로 가시려고 그 길로 들어가셨습니까? 그들을 살렸다는 만족감에 반갑게 물어 볼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젊은이보다 걸음이 빠른 듯 두 늙은이는 서로 마주보 며 차츰 가까이 왔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가 젊은이가 입을 열려고 우물거리는 그 순간, 하얀 옷을 입은 늙은이들은 어느 사이에 젊은이 곁을 지나쳐 쑥 뒤쪽으로 걸 어가 버렸다. 바람을 타고 가는지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 는다. ‘여보시오’ 다시 돌아선 젊은이가 저만치 걸어가는 노인들을 불러 세웠을 때, 그들은 똑같이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 쪽을 돌아보았다.그 찰라 아악! 젊은이 의 목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는 기절 초풍하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 다. 하얀 베옷에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쓰윽 돌아다보는 그 면상은 깎아지른 듯 절벽 뿐 이었다. 눈, 코, 입이라곤 애당초부터 타고나지 않았는지 전혀 그 형태조 차 없는 달걀 모양이 웃고는 숲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들어가면 죽어 나온다 는 그 숲속으로 하얀 안개가 사라지듯 슬그머니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혼비백 산 젊은이는 어떻게 거기를 빠져 나왔는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 싸리짝문을 박찼을 때는 지게 위에 잔뜩 얹었던 짐들은 온데 간데 없이 빈털털이 뿐 젊은 이는 넋을 잃고 말았다. 얼굴 없는 달걀 모양을 발견해서가 아니다. 하얀 베옷차림 으로 숲속을 향해 들어가는 두 늙은 영감 마누라 눈에 띄었을 때부터 젊은이의 혼 은 이미 홀려 버렸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젊은이는 그 달을 넘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 버리고 말았다. 몇해 전 초겨울 이 마을에 잔치 가 있었다. 선조대대로 이 탑삭골에 뿌리 박았던 양부자댁 외동딸이 시집가는 날 이었다. 그런데 신랑이 하루종일 먹은 음식이 체해서 설사병이 난 것이다. 뱃속이 하루종일 와글거려 숲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용변을 마치고 말위에 올라 옆을 보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분명히 말 위에 타고 있어야할 신부가 온데 간데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앗! 신부가 사라졌다! 그제서야 신랑의 비명 에 따라 수행원들이 황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자취없이 사라진 신부가 나타 날리 만무였다. 신랑은 목이 터져라 신부를 찾아 다녔으나 끝끝내 헛수고였다. 빈 말 한필만 이끌고 신부없는 신랑이 풀이 죽은 초라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선 것은 새벽 4시였다. 삼 십분 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이웃 마을 길을 자그마치 여덟 시간을 홀려다닌 것이다.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다녔는지 모른다. 밤새도록 동녘 이 훤희 틀때까지 휘돌아 다녔던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을 부르튼 발이 증명해 주 었다. 달걀도깨비는 항상 두 늙은 양주로 변신하여 나타나 이 탑삭골 주변을 맴돌 았다. 그러고 나면 반드시 이 마을에 장례가 겹치는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동네 에 한 늙은 영감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근본이 무엇인지 아 는 사람은 전혀 없었으나 그의 인격을 대해본 사람들은 그를 도사라고 불렀다. 조 그만 초막 호롱불도 없이 밤낮 앉아서 무슨 책인지 매일 읽는다는 것이다. 그 목소 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소리를 들은 사람은 가슴의 체증까지 확 뚫릴 정도로 맑 았다. 그 도사에 대한 구구한 억측이 떠돌아 다녔는데 풍문에 의하면 그는 일찍 처 를 여의고 홀아비 신세로 아들 하나를 고이 키워 장가를 보냈는데, 며느리가 행실 이 고약하여 시아버지와 간통했다는 무고한 소문이 퍼져서 그 마을에 살지 못하 고 쫓겨 나왔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바르지 못한 세상 인심에 회의를 품고 이 탑삭 골에 들어와 능선 바로 위쪽 숲속에 초막을 짖고 도를 닦았던 것 같기도 했다. 어 쨌든 아무도 돌보아주는 이 없이 몇 해를 그 초막에서 지내던 도사는 어느날 아침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도사님이 승천하신게야’ ‘아니 어쩌면 그분이 한을 품 었기 때문에 귀신이 된지도 모르지’ 마을 사람들은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사건은 그 다음해부터 번갈아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마다 그 도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그 날 그때쯤 되면 맑던 하늘도 컴컴하게 흐리고 음 산하여져서 탑삭골 능선 위에는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다. 언젠가 두려움 을 무릅쓰고 올라갔던 청년하나가 헐레벌떡 달려 내려오더니 ‘그 위엔 얼굴 없는 달걀귀신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을 마치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여 죽어버 렸던 것이다. 그 후로 달걀도깨비. 달걀귀신에 홀린 사람들이 속속 나타나 죽어갔 으나 원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달걀귀신이 반드시 마누라를 데 리고 다니는 것은 귀신이 된 도사가 생전에 부인을 몹시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튼 그 도사라고 불리우던 노인이 사라진 후로 이 탑삭골에 달걀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달걀귀신을 본 사람들은 살아나지를 못하게 되자 탑삭골 사람들은 날이 궂어 음산한 날이나 또는 해가 진 후에는 아예 이 숲속을 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질문[설화] 두류봉 황새 명당에 얽힌 설화

  조리면 대원리 소재 용문산 최북단 북맥 벌판 가운데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마치 큰 배 형체의 닻 같으며 뱃머리가 벌판을 향하여 떠나가려는 형상이다. 옛날 이곳 은 송림이 우거져 많은 학들이 깃들 있었다 한다. 이 마을에 거주하던 김수로왕 후 손 김태은 선조(先祖)는 어느날 아침 학들이 소란을 피우며 왔다 갔다 날아드는 것을 유심히 살피니 큰 구렁이가 노송 위의 학 둥지에 있는 새끼를 잡아 먹으려 하 는지라 이를 가련히 생각 끝에 활을 급히 가지고 나와 구렁이를 쏘아 맞히니 워낙 대들보같이 크나큰 구렁이는 소나무가지가 찢어지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순간 구 렁이가 활을 쏜 사람에게 독을 뿜으니 갑자기 몸 전신이 퉁퉁 부어 죽게 되었다. 학들이 날아와 이쪽 저쪽 몸뚱이를 쪼며 독기를 뽑아 내었으나 그는 결국 시름시 름 앓게 되어 죽고 말았다. 그런데 발인할 즈음에 별안간 황새들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상여를 인도하고자 날아가다 앉고 날아가다 앉고 하여 기이하게 여긴 동 리사람들은 이들 학에 발을 맞춰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니 바로 공능산 북맥 최단 두류봉 하서향의 아늑한 곳이었다. 이 지역은 한 마을에 사는 흥해 배씨의 종산으 로서 문중에 논의 끝에 할 수 없이 이분의 묘를 쓰도록 양여하게 되었다 한다. 이리하여 그 자리에 땅을 파니 커다란 반석이 나와 그대로 묘를 쓰려하였으나 너무 나 광중 구덩이 심고가 얕아 이 반석을 곡괭이로 쪼아 헤치니 갑자기 주위에 안개 가 자욱해지며 금붕어가 하늘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없이 그 자리에 장례를 지내었으나 그 후 현재까지 연달아 대대자손들이 선천적으로 애꾸눈으로 탄생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자리를 학이 잡아준 무 덤 또는 황새명당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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