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전설] 금무봉 주위에 얽힌 전설

 우리 고장 탄현면 금산리 한록산(漢麓山) 금무봉은 월롱산 서맥으로 씩씩하게 내려와 우뚝솟은 봉우리로 아름다운 옥녀가 춤을 추는 현용이라 하여 불려진 명산이다. 주위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 삼도품을 거쳐 황해바다로 유 입되고 조수물이 오르내리는 수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삼도품위 오두산(烏頭山) 은 백제가 구축한 산성이 있고 고구려, 신라와 치열한 격전을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오늘날 남북이 가로막은 이 지역에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어 매일 실향민과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금무봉 동쪽 아래 골짜기 옥녀 우물에서는 서출동류(西出東流)함으로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하는데 이 마을에서 숙종 때 태어난 민암은 1680년 대사헌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出陟)으로 남인(南人) 이 실각되어 파직되자 금망아지를 매고 살면서 새오리 임진강변에 정자를 짓고 소일하였으나 다시 기용되어 대제학, 병조판서, 우의정에 올라 갑술옥사(甲戌獄 事)가 일어나자 사사(賜死)되었다 한다. 또한 소론에 괘수 윤증의 아버지 윤선 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수문장으로 있다가 공격을 받자 부인이 자살하니 이곳으로 도망 은신 학문에 전념 교하향교에서 강론을 펼치면서 신곡서원을 구축 제자를 양성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부락은 명필, 문장가들 이 많이 배출되고 있는 특수한 지역으로 매년 산신제를 비롯하여 금산리농요 보존회에서 펼치는 농악과 회방아 다지기 등 민속예술이 전해지고 있는 마을이다.   

질문[전설] 갓 바위에 얽힌 전설

감악산 동북맥 준령으로 삼면이 둘러싸인 산골짜기 마을에 옛날 이씨들이 정착 수십 호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수백석을 하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인심이 후둑하여 늘 손객이 끊일 날이 없자 손님 치닥거리에 너무나 지쳐 어떻게 하면 손님이 안오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 늘 고심하던 중 도승이 시주를 청하자 그의 딱한 사정을 말했다. 그러자 도승은 “저 건너 산의 갓바위를 깨뜨려 없애면 재산이 줄어 손님이 점점 줄어 일년 안에 끊어지게 된다.”고 하며 “신중히 생각해서 거행하라.”며 사라졌다.  그 후 이 부자는 하인들을 시켜 그 갓바위를 깨뜨리도록 하니 이상하게도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오는지라 이 광경을 보고 하산한 후 시난고난 우환이 생기며 재산을 탕진할 뿐 아니라 병고가 자주 생기어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집안 식구들이 풍지박산 흩어져 폐가가 되었다 한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사람을 싫어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으며 언제나 남을 멸시하거나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잘못된 판단으로 일어난 일이라 하겠다. 사람이란 나만이 편안하면 된다는 마음씨는 패가망신하는 안일한 생각이다. 언제나 사람은 나 혼자서는 살지 못하는 법 여러 사람이 어울려 남녀가 서로서로 사랑하며 기쁨을 같이 나누며 오손도손 살아가는 인생살이야말로 참된 보금자리리라. 

질문[전설] 얼음실 한 장굴에 얽힌 전설

  탄현면 법흥 4리 벌두매 산골짜기 호장산하 오솔길 옆에 큰 바위가 있다. 옛날 피난을 가던 부부가 힘에 겨운 피난 보따리를 이고 지고 가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 따라오던 아이가 울며 물을 달라고 보채니 여름날씨가 너무나 짜증이 난 그들 부부가 아이를 달래며 「이 아래가서 물을 떠 올터이니 이 바위 곁에서 기다려라」 하고 내려가던 중 갑자기 군대가 몰려와 허둥지둥 그냥 떠나 버렸다 한다.    그리하여 기다리던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지쳐 한 장굴 속에서 굶어 죽고 말았는데 이 아이가 죽은 혼이 바위에 영접해서 한여름에도 이 바위에는 어름같이 찬물이 흘러내리게 되었으며 이 골짜기에 12우물이 생겨나 인근 전답엔 용수가 충분할 뿐 아니라 부락민들의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부락에는 정종대왕의 아들 순평군(順平君)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이 얼음실 골짜기에는 근래 이주하씨가 홀로 살고 있던 지역이다.

질문[전설] 두지리(斗只里)에 얽힌 전설

 적성면 두지리는 원래 「斗只」가 아닌 「頭者」로서 용마의 머리와 장등이 같다는 앞산이 쌀이 가득찬 견 뒤 모양을 한 견대형국(肩大刑局)으로 이루어져 붙혀진 이름이며 이곳 주민들은 재산을 모으면 타지로 떠나야 그 재산을 유지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에는 450여년 전에 경주 최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으나 그 후 각 성씨가 들어와 옹기를 만들어 살게 된 임진강변 조그마한 벽촌마을로서 현재는 축산업을 경영하며 고기잡이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매년 음력9월 9일 국사봉 뒷산 중턱에 올라가 밤12시에 집집마다 소지를 올리며 산신제를 지내고 용머리산을 타고 내려오게 된다. 옛날 이 용머리산 아래 잘 산다는 김씨라는 노인이 살고 있다. 김노인은 어찌나 욕심이 많았던지 스님이나 걸인이 와도 쌀 한 톨 주지 않는 구두쇠영감이었다. 어느날 금강산에 산다는 도승이 찾아와 하루밤 쉬어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니 거절하자 도승은 당신은 뒷산 용마루 아래 선조 산소를 쓰면 더욱 큰부자가 될 터인데 하고 돌아갔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 말을 곧이 듣고 며칠 후 아버지의 묘를 이곳에 천묘하고저 용의 허리를 끊으니 붉은 피가 솟아 나와 임진강으로 흘러 내렸다 하며 구두쇠 영감은 그 자리에서 벼락을 맞아 즉사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지금도 피가 모여 있던 곳을 가리켜 피머리라 부르고 있다 한다. <두지리 임종수(林鍾洙)제보〉    

질문[전설] 시인 고죽 최경창선생에 얽힌 전설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선생은 서기 1539년 9월(중종34) 월롱면 영태리 에서 출생 평안 병마절도사 수인(守仁)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 박순 (朴淳)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문에 능통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구봉 송익필(龜 峰 宋翼弼)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으며 또한 당시(唐詩)에 뛰어난 백광훈 (白光勳), 이 달(李達)과 함께 3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었다. 서기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 장원 급제하고 대동도찰방(大同都察訪)을 거쳐 1575년 정 언(正言), 경성부사(鏡城府使)를 지냈으며 1583년 방어사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상경도중에 죽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피리를 잘 불어 영암 해변에 살 때 왜구를 만났으 나 퉁수를 구슬피 불자 왜놈들이 향수에 젖어 흩어져 감으로 위기를 모면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숙종 때 청백리에 록선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경도 북평사에 있을 때 사귄 홍낭(洪娘)은 관북인(關北人)으로 홍 원(洪原)의 명기로 이름이 났고 출상한 재화로서 그의 절창인 시조일수가 오직 청 아와 정숙을 담아 주옥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최경창이 북평사 퇴임할 때 낭(娘)이 석별하여 바친 글월로 한역번방곡(漢譯飜方曲)을 지어 읊으시니 격조 높은 쌍벽 으로 세전되어 홍낭의 문명시사에 빛나고 있다. 또한 고죽선생 풍류반려(風流伴 侶)에 기록되었으며 낭(娘)은 고죽선생이 관북(關北)에 있을 때 막하에서 조석으 로 모시었고 환경(還京) 3년 후 요한 하신다는 전언을 듣고 불원천리 칠일만에 상 경 시양을 하였다 하며 경성 객사에서 1583년(선조16)에 돌아가시자 영구따라 공 근 시묘하니 지순고절(至純高節) 당세에 빛냈으며 낭이 죽자 문중합의로 고죽선 생 묘전에 후장하였으니 낭이 인창을 가히 알지니라. 당초에는 파주시 월롱면 영 태리에 있는 누대 선영하에 모시었으나 정부시책상 증발되어 후손들의 주선으로 교하면 다율리로 고죽선생과 함께 1969년 6월 12일 천장되어 심산의 한떨기 유향이 고죽선생의 유덕을 문중사화로만 그치니하고 새로 비명하여 홍낭 시인도 함께 영세를 기하는 동시 숭문상덕(崇文尙德)의 조훈에 보답하기 위하여 문명을 다시 현창하였다. 유서는 고죽유고(孤竹遺稿)가 있으니 고죽선생을 사모 하여 보낸 홍낭의 애절한 연시(戀詩)를 받고 이를 한역(漢譯)하여 사랑의 편지와 함께 보냈던 친필을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1981년 7월 5일자 조선일보 소재) ◇홍낭 연시와 고죽선생 번방곡비문◇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남의 손대자시 난창밧긔 섬거다 보고쇼서 밤비예 새님곳 나거단 나전가도 너기쇼셔 (홍낭) 절양류기여천리 인위아시향정전(折楊柳寄與千里 人爲我試向庭前) 수지일야신생엽 추췌수 미시강신(須知一夜新生葉 椎悴愁 眉是姜身) (고죽) 이 비는 고죽선생의 전적에 의하여 서기 1981년 11월 전국 국어, 국문학, 시가비 건립 동호회(同好會) 김동욱(金東旭)외 56명과 문중협의로 시비를 1969년 6월 건 립한 것임.(국문학 전사유서)  

질문[전설] 눈물겨운 고려장(高麗葬)의 전설

  삼국 전쟁으로 어수선한 고구려 말 영양왕 시절, 부모가 늙어서 쇠약해지면 산에 토굴을 파서 죽기 전에 생매장을 하고 돌아가신 후 매장하는 일시적인 순장 풍속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늙어 병든 아버지가 있어 산에 굴을 파고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토굴속에 넣어두고 지게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집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손자가 보게 되었다. 손자는 자기를 귀여워 해주시던 할아버지를 못 잊어 산에 올라가 할아버지를 다시 지게에 지고 집으로 모셔 오려고 하였으나 힘이 약하여 빈 지게만 지고 내려왔다. 이를 보고 있던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이놈아! 그 지게는 버리고 오는 법인데 왜 다시 갖고 왔느냐 당장 산에 버리고 오너라.”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지게를 왜 버립니까 이 지게를 잘 두었다가 제가 쓸 데가 있을거예요.”하고 대답을 하였다. “이놈아! 그 지게가 아니더라도 다른 지게가 얼마든지 있을 터이니 어서 버리고 오려무나.”라고 아버지가 말하자 아들이 “아니에요 이 다음에 아버지가 늙으시면 제가 이 지게로 지고 갈래요.”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의 뜻밖의 대답에 가슴이 섬짓하여 “아차, 다음이 바로 내 차례구나.”하고 탄식을 하였다. 아무리 부모를 똑바로 섬기지 못한 어리석은 불효자라도 나이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나서 가슴이 철렁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산으로 올라가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와 극진히 공경을 하였다. 이러한 실정이 나라에 알려지 자 임금께서는 그동안 있었던 순장 풍속을 없애도록 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핵가족 제도로 늙은 부모를 버리거나, 멀리 떨어져 살며 부모를 보살피지 않는 자식들을 생각할 때 옛날 부모를 고려장 지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젊은이들은 다시 한번 각성하여아 할 것이다. 우리 고장 장단 진동면 서곡리 산 101번지에도 아직까지 고려장을 지낸 무덤의 흔적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달걀뿌리의 귀신과 도깨비 전설

장명산 동남백내력 교하면 교하리 산 1번지 끝머리는 벌판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 었는데 이 지역은 금촌 쇠곳나루(金串津)에서 배를 건너 벌판 가운데 길을 지나 이산 달걀뿌리에서 산기슭을 휘돌아 길 옆 행상독아를 지나 4km거리 옛날 교하군 청이 있는 교하리를 왕래하게 되는 큰길이었다. 쇠곳나루에는 상선배와 고기배들 이 일상 체류하게 되자 나루위 편편한 동산에 800여년이나 되는 은행나무 고목아래 시장이 개설 일시적 호황을 이루니 여러 사람들이 더욱 이 길을 많이 이용하게 되 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종 2년(1865)을축년 대홍수로 말미암아 이 산 뿌리 아래 길뚝이 무너지면서 주위 600여미터나 되는 달걀모양으로 수십길이나 패여진 웅덩 이 연못이 생기게 되니 할 수 없이 연못위쪽 논섭에 통나무로 가설된 외나무다리 를 설치 왕래하다보니 자칫 잘못 건너다가 연못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이 생겨나 게 된 험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외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건 너게 되는데 더욱이 이 근처에는 교하 보통 학교만이 6년제가 있어 금촌 지역에 사는 어린 학생들도 이 외나무 다리를 일제말엽까지 왕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속 에서 이 산 뿌리를 달걀뿌리라 부르게 되었는데 날이 흐리거나 비가 부슬부슬 내 리는 저녁에는 머리를 산발한 여러 귀신들이 연못에서 나와 슬피 울며 이 산 뿌리 를 돌아다니고 있다 하여 밤이 되면 이 길은 아예 다니기를 두려워하였으며 통행 을 금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당하리에 사는 장력과 기운이 세다고 자랑하는 김서방이 어느날 쇠곳나루 시장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밤이 늦게 되니 친 구들의 자고 가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상관없다면서 배를 건너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 이 험지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여쁜 아가씨가 소복에 머리를 산발을 하고 연못에서 나오면서 어서 오라며 반색을 하는지라 그리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큰소리를 지르면서 빨리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고 빠른 걸음으로 외나무다리를 건너 달걀뿌리를 지나니 옆으로 또 다가서며 나하고 같이 살자면서 아양을 부리고 애원을 하였다. 갑자기 온몸이 떨리며 가슴이 오싹 두근거리기 시 작하며 땀방울이 맺혀 눈을 잠시 감았다 뜨면서 정신을 차려 다시 호통을 치니 통 곡을 하며 물러가는지라. 그리하여 두 손을 불끈 쥐고 행상독을 지나려는데 난데없이 험한 얼굴을 한 구척장신이 나타나서 이놈이 네가 힘이 세다는데 얼마나 센지 한번 겨뤄보자고 희롱을 하며 덤벼드는지라 할 수 없이 죽을 힘을 다 하여 서로 안고 뒹굴고 자빠지며 쫓기고 쫓기면서 벌판을 헤매는 순간 첫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도망을 가는 그놈을 개궁창에 쓰러뜨리고 정신을 차려 집으 로 돌아오니 전신에 땀이 흘러내려 옷이 심하게 젖어 흙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급 히 옷을 갈아입고 피곤한 몸으로 정신없이 아침도 못 먹고 한나절을 푹 자고 나니 정신을 차려 밤새도록 벌판을 헤매고 다닌 것을 곰곰히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벌판 건너편 금촌리 가나무골 노인들은 이 구동성으로 궂은 비가 오는 저녁에는 항상 행상독 아래에서 달걀뿌리로 도깨비불 이 왔다갔다 하였다는 사랑방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으며 옛날에는 귀신(魂), 도깨 비(魁)가 득실거려 수많은 재미있고 가슴이 오싹하는 여러 전설에 내려오고 있으 나 근래에는 어찌된 일인지 귀신 도깨비를 보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궁금 한 수수께끼라 하겠다. 

질문[전설] 판문교(板門橋)에 얽힌 전설

고려 말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600여년전의 일이다. 지금의 판문점부근 한 마을에 어여쁜 딸 하나를 둔 촌장이 살고 있었다. 촌장의 딸 옥화는 그 미모가 어찌나 고왔던지 인근 총각들이 보기만 하면 그만 첫눈에 홀딱 반하여 짝사랑에 가슴을 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 옥화에게 참으로 딱한 일이 일어났다. 인근 동네의 성질이 우악스럽고 기운이 황우같은 장사로 이름난 억쇠라는 총각이 물을 긷는 옥화의 자태를 보고 그만 첫눈에 반하여 짝사랑을 하다가 급기야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된 것이었다. 억쇠의 어머니는 아들의 이런 말 못할 사정을 모르는 터라,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 도리가 없어 애만 태우고 있었다. “얘, 억쇠야!사람이 삼시 세때 밥을 먹어야 사는 법인데 사흘이 넘도록 밥을 안먹으니 어쩐 일이냐?” “아프단 말여!” 억쇠는 귀찮다는 듯이 한마디를 내뱉고는 돌아 누워버렸다. “그래 아프다니, 배가 아프냐?” “아뇨!” “에이구 답답해라. 머리도 안 아프다, 배도 안 아프다, 그럼 어디가 아프단 말이냐, 응?” 어머니가 이렇게 가슴을 치면서 속 시원히 말이나 하라고 졸라대도 억쇠는 끙끙 앓기만 할 뿐, 자세한 병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억쇠가 앓고 있는 병은 다름 아닌 상사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끙끙 앓아 누운지 닷새가 지나자 억쇠의 몰골은 못 알아볼 지경으로 변해버리고 우선 무엇보다도 허기가 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글쎄, 이 녀석아! 진맥을 해야 약을 쓰지. 그래,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응? 어서 말해봐!” “에이, 어무니! 속을 모르면 말을 말란말여?” “에이그, 아 그럼 속을 알게 말이나 속 시원히 해보란 말이다.” “그럼, 어무니! 내 소원 들어 줄테여?” “아. 글쎄 들어 줄테니 소원이 뭐냐?” 어머니가 이렇게 타이르듯 달래자, 억쇠는 어린애같이 얼굴을 붉히면서 히죽히죽 웃기부터 했다. 어머니는 한편으로 안심은 되었지만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려는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래, 네 소원이 뭐냐, 응?"“저, 저 말여, 나 장가갈테여. 히히..”“장가? 에이그, 이런 엉큼한 녀석!” 어머니는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소리에 그만 억쇠의 머리를 두어번 쥐어박아 주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못할 말도 아니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사내 나이 벌써 열아홉이 되었으니 장가가겠다는 것이 잘못일리 없었다. 게다가 기운이 황우같은 장사요 외아들이니 마음 같아서는 하루라도 빨리 짝을 지어 후사를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다. “그래, 어디 맘에 둔 처녀라도 있냐?” “으음, 저... 나 옥화한테 장가갈테여!” “아니, 옥화? 에그, 이 녀석아, 당찮은 소리 입밖에도 내지마라.” 어머니는 황황히 억쇠의 말을 가로막았다. “원 아무리 철이 없고 못 배운 자식이기로서니 그렇게 턱없는 소리를 할까.” 답답할 뿐이었다. 마을 촌장을 대대로 해오는 지체 높은 집안에다 재산 많고 거기다가 인물까지 뛰어나서 감히 마을 사람들이 넘겨다 보지도 못하는 옥화인데 만약에 이런 소리가 마을에 퍼지는 날이면 모자는 영락없이 멍석말이를 당해 쫓겨날 일이었다. 어머니는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억쇠와는 빗대어 보기도 미안한 일이었다. “어무늬! 왜 옥화 싫어?” “에이그, 이 철없는 자식아!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구, 가문 좋고 지체 높고 인물 좋은 옥화 아가씨를 너같은 떠꺼머리한테 빗댈 수나 있겠냔 말이다. 응? 에이그, 쯧쯧 철없는 자식...” 어머니는 이렇게 아들을 나무라고 단단히 일렀으나 남녀간의 정분을 어찌 인력으로 막을 수가 있으랴. 억쇠는 더 한층 가슴이 쓰리고 마음이 허전하여 애간장을 태우다가 급기야는 큰 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이르러 옥화의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다급한 판에 이르자 억쇠의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촌장에게 찾아가 백배사죄하고 사연을 말하니 촌장은 행여 소문이 날까 두렵다고 두 손을 내저으며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촌장에게 매달려 애원을 다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억쇠는 짝사랑에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죽은지 며칠이 도지 않아서 이 판문점 마을에는 괴이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판문점과 덕현동을 양쪽에 두고 흘러 내려오는 사천강이 자꾸 범람하여 그 위에 놓인 판문교가 물에 떠내려간 것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하여도 새로 둑을 쌓고 다리를 놓아도 그 다음날로 억수같은 비는 둑을 무너뜨리고 다리를 삼켜버리곤 하였다. “사천강이 넘쳤다아---” “다리가 떠내려 갔다아---” “홍수다! 홍수!” 이런 외마디 소리가 마을에서 그칠 사이가 없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까닭모를 이 변괴에 겁을 먹게 되었고 별의별 소문들이 다 퍼지기 시작하였다. 판문점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계시라고도 하고, 마을이 망할려니까 그런다느니, 소문은 소문을 낳고 자꾸 말이 보태져 번지고 있었다. 마을 촌장은 속이 몹시 탔다. 하루는 견디다 못해 강둑을 살펴보러 홀로 나갔더니, 강둑에 웬 여인이 소복을 곱게 입고 앉아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는게 아닌가! “사랑 사랑 짝사 랑에 병들어 죽은 총각 사천강에 흑룡되어 원한을 품었으니 어이할꼬 그 아씨를 어이할꼬...” 촌장은 그 여인의 구슬픈 노랫가락을 듣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짝사랑에 병들어 죽은 총각이 사천강에 흑룡이 되어 원한을 품었다니 그것은 필시 자기 딸에게 반했던 억쇠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촌장은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조심조심 여인 곁으로 다가가서 나직이 여인을 불렀다. 그랬더니 여인은 소름이 끼치도록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남기고는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어? 귀, 귀신이었구나! 사람 살려! 사람 살려어!” 촌장은 그만 혼비백산하여 마을로 도망쳐오고 말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을 입밖에 낼 수가 없었다. 사천강이 자구 넘치는 까닭도, 판문교가 자꾸 떠내려가는 것도 다 억쇠의 원한 때문인 것만은 분명한 일이었으나, 만약에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아는 날이면 억쇠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하여 자기 딸 옥화를 제물로 바치자고 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촌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나중에는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밤! 촌장의 딸 옥화가 꿈을 꾸었는데 머리가 셋이나 달린 시커먼 용이 옥화 앞에 나타났다. 옥화는 그만 대경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흑룡은 껄껄 웃었다. “허허허, 옥화! 옥화!” “아니 댁은 뉘십니까?” “놀랠 것 없소! 나는 당신을 짝사랑하다가 뜻을 못이루고 죽은 억쇠라는 사람이오!” “네에?” “내 생전에 못 이룬 사랑이 한이 되어 죽어서 사천강에 흑룡이 되었으니 홍수가 난 것도 다리가 떠내려 간 것도 당신 아버지가 병이 든 것도 다 내가 조화를 부린 탓이오!” 옥화는 그 말에 그만 흐느껴 울며 흑룡에게 애원하였다. “하오나 저희 아버님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럼, 내 말을 잘 듣겠소?” “소녀더러 어찌하라 하시는지 어서 말씀이나 해 보십시오.” 흑룡은 순간 껄껄껄 한바탕 웃고 나더니 옥화를 그윽히 바라보며 천천히 말하는 것이었다. “내 이제부터 방법을 이를 것이니 잘 들었다가 그대로 실행하면 다시는 사천강에 홍수가 아니 날 것이요 다리도 떠내려가지 아니 할 것이며 당신의 아버지도 병이 나을 것이오!” “그 방법을 일러주시면 소녀가 분부대로 거행하겠사옵니다.” 옥화는 머리를 조아려 흑룡에게 꼭 일러주는대로 실행하겠노라고 몇 번이고 다짐을 하였다. 그제서야 흑룡은 그 방법을 옥화에게 일러주었다. “이 다음에 새로 다리를 놓거든 정성들여 제사를 지낸 후 옥화 당신이 맨 처음 그 다리를 건너시오. 그럼 다시는 홍수가 안 나도록 내가 보살펴 주리다!” “그럼, 소녀가 맨 처음 그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되는 것이옵니까?” “그렇소. 잊지 마시오!” 흑룡은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튿날 아침,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꿈이라 옥화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간밤의 꿈 이야기를 아버지께 했다. 촌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참이라 옥화의 꿈대로 실행할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일렀다. 그랬더니 그날로 촌장의 병이 사라지고 사천강에 새로 다리를 놓게 되었다. 돼지를 잡고 산나물을 마련하고 무당을 불러다가 떡시루를 곳곳에 놓고 촌장이 제주가 되어 우선 용왕께 정성껏 제사를 드리니 흐렸던 날씨가 맑게 개이고 산들산들 바람까지 알맞게 불어 마을 사람들은 더없이 기뻐하였다. 이윽고 제사가 끝나고 촌장의 딸 옥화가 새옷으로 갈아입고 조심조심 다리를 건너가게 되었다. 다리 양쪽에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피리를 들고 꽹과리를 치며 옥화가 다리를 건너는 모양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옥화의 아버지 촌장도 희색이 만연하여 딸이 다리를 건너가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는데 옥화가 다리 중간에 막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마른 하늘에 뇌성벽력이 일고 시커먼 먹구름이 일진광풍을 몰고와 세상은 일시에 어둠에 싸여 버렸다. 바로 그때 시커먼 머구름속에서 머리가 셋 달린 흑룡이 튀어나와 다리에 서 있는 옥화를 덥석 나꿔채 가지고는 쏜살같이 하늘로 올라가는게 아닌가! “옥화야! 옥화야!” 촌장이 두 발을 동동 구르며 딸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으나 옥화는 비명 한마디 지르지도 못하고 어느새 구름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촌장은 그만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으나 마을 사람들이 업어다 치료하여 겨우 목숨만 건졌다. 흑룡이 옥화를 데리고 사라져버린 다음, 하늘은 신통하게도 맑게 개이고 그후부터는 사천의 물이 나날이 줄어 홍수가 나기는커녕 갈수록 강폭이 좁아지더니 나중에는 잔잔한 냇물로 변하였다. 그 뒤에 놓인 다리도 떠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천강 지류 위에 놓인 판문교는 무심히 흘러가는 세월과 냇물을 묵묵히 굽어보며 억쇠의 짝사랑을 말해주고 있는데,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통나무 다리가 콘크리트로 변해 남북을 잇는 구실을 해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졌다. 그래서 지금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채 물속에 잠겨있다. 옛날의 덕현동 뒷산에 올라보면 판문점 회담장소 왼편의 냇물 위에 부서진 다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짝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판문교이다.   

질문[전설] 장명상 구절초에 얽힌 전설

옛날 조선시대에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아낙이 아이 갖기를 소원한 나머지 지금 은 흔적도 없는 교하면 장명산 중턱에 위치한 약수터에 올라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으면서 지성을 드린 후에 아이를 갖게 되자 그 소문 이 한양 땅에 퍼지게 되어 아이를 갖지 못한 양반님네 부인들이 매년 음력 9월 9일 에 장명산에 내려와서 약수물에 밥을 지어 먹고 구절초 대린 물을 먹어서 아이를 갖게 된 일이 많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구절초는 여자의 냉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질문[전설] 장사 출생과 말무덤에 얽힌 전설

 군내면 백학산 준령이 서남맥으로 덕진당을 거쳐 임진강변을 끼고 내려와 삼선산(三仙山) 우뚝솟은 봉우리에서 양편으로 펼쳐진 지맥 내령끝머리 쌍태봉(형제산)이 있는 아래 한수동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에는 옷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찬우물이었다. 이 샘물가에 초가산 간에서 농사를 직고 있는 가난한 김씨농부가 살고 있었다. 이 농부는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는 데 눈이 찢어지고 용모가 특이한 모습으로 성장함에 따라 범상치 않은 장수좌태로 부부는 기 뻐하는 한편 두려운 생각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6세가 되니 형제봉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비호같이 빠르며 영특하게 자라났다. 어느날 부부가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아보니 아이는 시렁대들보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당황한 기색으 로 “네가 어떻게 올라갔느냐” 하며 내려오라 하자 아이는 성큼 뛰어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상황을 보고 부부는 걱정과 두려움이 태산같아 마음을 조리고 쉬쉬하고 살았다. 어느날 밤 아기가 자고 있는 틈을 타 겨드랑이 밑을 보는 순간 날개돋힌 털이 보이자 부부는 장사가 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문이 나면 후한을 막을 도리가 없어 고민 끝에 할 수 없이 아이의 겨드랑 날개를 인두를 달구어 지저버렸다. 그때 갑자기 뒷산 골짜기에 안개가 덮치면서 형제봉에서 우렁찬 말울음 소리가 나매 허둥지둥 바깥으로 나와 형제봉을 쳐다보니 용맹스러운 날개돋힌 용마가 이리뛰고 저리뛰며 훨훨 날아다니고 있어 하도 이상하여 산마루에 오르자 용마는 금은빛나는 안장을 덥고 바위돌을 잔뜩 싣고 이산저산 훌훌 뛰어 넘어 다니다가 묵은 나무 그루터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 죽으니 장사아이도 따라 죽고 말았다 한다.그후 부부는 용마의 죽음이 가여워 말이 죽은 자리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으나 지금도 산중턱에 큰 바위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말의 발자국이 움푹 파여진 것을 볼 수가 있으며 그 후 말무덤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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