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설화] 보광사에 얽힌 설화

광탄면 영장리 산 17번지에 소재한 보광사는 파주 관내에서 제일 큰 사찰로서 서 기 894년(신라 진성여왕 8년) 왕명으로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것이며 당시 전국 6대 사찰 중 하나였다. 그 후 서기 1215년(고려 고종 2년)에 원진국사(圓眞國 師)가 중창하고 1388년(고려 우왕 14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3창하여 내려 오 던중 조선조 임진왜란으로 국운의 풍전등화로 완전 소실한 것을 1667년(현종 8)에 지간(知侃), 석련(釋蓮) 두 대사께서 4창하여 1740년(영조 16년)에 면모를 갖추어 서 중수하고 인근에 있는 영조생모 숙빈 최씨의 소령원을 기도하는 절로 삼았다 한다. 대웅전은 조선 중기의 다포계(多包系) 양식이고 팔작개와(八作蓋瓦)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다. 좌우 후면의 판 벽에 그린 보살라한(菩薩羅漢) 역사(力士)등 의 벽화가 남아 있는데 많은 풍상이 서려져 있다.  보광사가 위치한 고령산은 무려 280정보에 달하는 어마어마하고 광할한 절경으로 꾀꼬리 상봉에 올라 보면 사방 이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선경이다. 또한 이 지역은 임난시 서산 대사의 막하 승병과 양민 수 천명이 왜적과 싸웠던 대혈전지로 그때 장렬히 전사한 이름없는 호국영령을 위한 위령탑이 하나 없어 이 민족의 한을 깊이 묻어 버린 애국열사들의 호국이념을 오늘에야 들추어 내게 됨은 부끄러운 일이며 이곳 에서 많은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근래에도 출현되고 있다. 이 사리는 우리 불자 (佛子)들의 가슴깊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일깨우는 자비하신 부처님의 뜻을 재계 (再啓)하는 구법(求法)시대의 실증법문과 동시에 호국이념과 불교사상을 구현하 는 불은(佛恩)임을 알게 한다. 국난극복과 통일염원을 부처님의 가호 아래 삼보 (三寶)가 부르는 소리를 인연하여 1981년 8월 30일(불기 2525년 음8월2일) 이희성 (李熺性) 육군대장의 발원으로 불탑건립 추진위원회를 주선하여 한갑진 거사(韓 甲振居士)를 위원장으로 불사를 진행 그 신앙을 깊이 심어 올리는 불상 높이 41척 의 대작불을 건조하게 되었으며 이 거대한 불상의 탑신형과 지대석의 사 성제(四聖蹄)는 팔정도(八正道) 기단삼단석(基壇三段石)은 삼보(三寶)를 상징케 하였으며 탑신내부에는 진신사리(眞身舍利) 11과 세계 6대주에서 구입해온 진귀 한 보석과 불상 그리고 내국의 법화경 기타 예술작품, 발원문, 상기문(像起文)등 이 건립 봉안되었다. 이리하여 보광사는 대웅전을 비롯한 고령산 정상 마루아래 도솔암과 양편에 있는 수구암(守口庵), 영묘암(靈妙庵), 대한불교조계종 보광사 신도회 중앙승가대학수련원 등 전통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계곡 에서는 맑은 물이 주야로 많이 흘러내리고 울창한 숲속은 유원지로서 각광을 받 게되자 많은 신도들과 아울러 관광객으로 하여금 일상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질문[설화] 용암사 사적에 얽힌 설화

 고려 13대 선조대왕은 왕후에게 후사가 없어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를 맞이 하였으나 또한 아무런 보람이 없어 일상 초조히 기다리던 중 어느 날 밤 후궁한테 도승 두 사람이 홀연히 나타나 우리는 남쪽 백 여리 되는 산(현 장지산) 남쪽 기슭 에 있는 바위에 사는데 양도가 끊어져 곤궁하게 산다면서 사라지자 깜짝 놀라 깨 어나니 꿈인지라 즉시 후궁은 사람을 데리고 그 지점 근처를 샅샅이 살피니 과연 화강암으로 조각된 거대한 쌍석불이 있는데 우람스럽게 정립한 장관을 보게 되었 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풍파로 인한 불상이 너무나 초라하여 주위환경을 청결히 하고 그 밑에 주택을 마련 백일정성 공양기도를 마친 얼마 후 임신되어 한산후물 왕자를 탄생하였다 한다. 이로 인연이 되니 매년 수시로 이곳을 찾 아 안녕질서와 국태민안에 발원기도를 올리었으며 사찰을 건립케 하고 혜음사(惠 陰寺)로 명명 국사로 하여금 수호토록 하였다 한다. 또한 석불좌측에는 사지가 있 으며 감노정(甘露井)이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그 후 대선사(大禪寺)로 개칭하였 다 하며 여러 대사들이 오고 가고 세월은 흘러 임진왜란 당시 폐허가 되어 내려오 던 중 본 부락에 사는 박금용(朴今用)을 비롯 면내 신도 심상각, 조수천, 이종구, 이동훈(沈相恪, 曺守天, 李鍾九, 李東薰) 등의 주선으로 1935년 4월 대웅전 3칸을 재건하고 장단군 덕물산사에 있는 장선환대사를 영입 수호케 하는 한편 용암사 (龍庵寺)로 명칭을 바꾸고 동년 5월 24일 대한불교 조계종에 등록시켰다. 그후 또 파괴되어 1946년 2월 5일 백정 만월대사(白淨滿月大師)의 주선으로 화주승 김혜 성(化主僧 金惠城), 대시주 석보명일 신윤현(大施主 釋普明日 申潤鉉) 등 신도들 의 열성으로 삼창 건립을 하고 혜종원(惠宗院)이라 하였다.1970년 손승요(孫承 堯) 주지스님을 거쳐 1980년 4월 오현정(吳賢定) 주지스님의 부임이래 눈물겨운 피나는 노력 끝에 대웅전을 사창 건립 용암사(龍岩寺)라 개칭하고 신도회장 조수 천(曺守天)과 1981년 요사체 10칸을 세웠으며 1984년 10월 범종각(梵鍾閣)을 세우 는 한편 대웅전, 단청 등 명승 사찰로서 면모를 갖추게 됨으로 조석으로 타종소리 를 듣게 되었다. 또한 남북통일 기도원을 겸한 미륵불 수호와 국태민안과 아울러 무자식 신도들의 발원기도와 더불어 각지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을 비롯한 신도들 이 다녀가고 있다. 

질문[설화] 파평윤씨시조 태사윤신달 발상 설화

  파평산 서북맥내령 기슭에 있는 깊이 10미터 넓이 백수십보(2,000여평)가 되는 큰 연못에서 서기 893년(신라 진성왕 7) 8월 15일 천둥번개와 아울러 소나기가 쏟아지면서 운무가 사면에 자욱한 가운데 연못위로 갑자기 번쩍거리는 금궤가 떠올랐다. 이를 본 관원들이 이상히 여겨 태수에게 사연을 고하고 즉시 와서 보니 금궤는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어졌다 한다. 그날 해가 질 무렵 근처에 사는 노파가 그 연못에서 빨래를 하는데 서산에 무지개가 찬란하게 뜨며 또다시 금궤가 떠오르자 이를 건져 안고 집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금궤안에 오색이 찬란한 우모(羽毛)에 싸여 있는 남자 아이가 서광이 빛나는 눈과 용모가 범준하며 양어깨에 붉은 점이 日, 月을 상징하고 양쪽 겨드랑밑에는 87개의 용(龍)의 비늘이 있으며 등에는 북두칠성의 검은 점과 손바닥에는 尹자 모양의 손금이 그어져 있었다 한다. 이분이 바로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이다. 이분은 성장함에 따라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여 학문에 능숙하였으며 파평산 금강굴에서 용마(龍馬)을 얻어 무예를 익히며 파평산 정상을 비호같이 오르내렸으며 이곳을 치마대(馳馬臺)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가운데 어느해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물론 산야에 초목이 고사할 지경에 이르자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국왕께서 제문을 지어 올리도록 문신들에게 지시하니 문신들이 갑작스런 일로 생각이 안나 주저하는 것을 본 윤신달이 제문을 지어 올렸는데 ‘군신이 죄가 있으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을 마르고 타게 하나이까? ’宣君臣之有罪甘受 災殃 奚草木之無知等 蒙焦熱(선군신지유죄감수 재앙 해초목지무지등 몽초열)란 글귀로 써 놓으니 과연 명구(名句)라며 문신들이 탄복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쏟아졌다 한다. 고구려는 당시 궁예왕 막하에 왕건, 윤신달, 신종겸, 홍유, 복지렴, 유검필등 쟁쟁한 명장 걸사들이 모여 세력을 확장 국호를 후고구려로 하고 강원, 함길, 평안, 황해도의 북방지역을 장악 도읍을 송도로 하고 또한 철원으로 천도 태봉(泰封)으로 국호를 개칭하였다. 그러나 태봉왕이 된 궁예왕은 날로 난폭하고 잔악해져 중신들의 학살등으로 민심이 흉흉하게 되어 덕망이 높은 왕건에게 조정백관을 비롯 백성들이 따르게 되자 태봉왕은 왕건이 반역할까 두려운 나머지 관심술을 써서 나를 반역할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고 호통을 치며 죽여 없애려고 왕건은 소리치며 물러나와 윤신달,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유검필, 박술연 등 제장들과 의논 끝에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키로 하고 궁궐로 쳐들어가니 918년(동예 26세) 궁예왕은 궁중에서 빠져나와 강원도 부경(現 平康)으로 도망치다가 피살됨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이리하여 왕건이 등극 송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로 하고 고려왕국 태조가 되었다. 이 당시 윤신달은 파평현에 거주함으로 개국백에 봉한 후 본관을 파평(坡平)으로 하였다. 당시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씨 三姓이 992개년(55世) 집권해 내려오던 중 935년(신라 경순왕 9) 국정이 문란 민심이 날로 쇠퇴함으로 고려조에 굴복 폐망되었으며 또한 전라도 지방에 진훤이 892년 후백제를 세워 그의 아들 신검이 건국 45년만에 고려에 항거함으로 삼국통일이 되었다. 이는 오직 고려 태조를 극진히 보필한 중신 태사 윤신달선생께서 일상 덕을 닦아 인의 토대위에서(修德行 仁以利天下)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간곡한 권유로 말미암아 왕건이 큰뜻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으며 태조는 삼국통일 후 신라와 후백제를 평정한 것도 윤신달의 공이 크다 하였다는 전설(羅濟之平 尹莘達之功也)이 내려오며 아래 건국공신들에게 책훈을 내리었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坡平尹氏 始祖 尹莘達),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平山申氏 始祖 申崇謙), 경주배씨 시조 배현경(慶州裵氏 始祖 裵玄慶), 달성홍씨 시조 홍유(達城洪氏 始祖 洪儒), 오천복씨 시조 복지겸(汚川卜氏 始祖 卜智謙), 안동김씨(신) 시조 김선평(安東金氏(新) 始祖 金宣平),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文化柳氏 始祖 柳車達), 전의이씨 시조 이탁(全義李氏 始祖 李탁 ), 안동장씨 시조 장길(安東張氏 始祖 張吉)또한 그밖에 20명에게 수훈을 내렸다.태사윤신달선생은 문무를 겸전 인의지도(仁義之道)를 제창 파평사저에서 송도로 말을 타고 조정에 입궐당시 임진강 여음탄을 매일 도강하는데 강을 건널적에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육지를 다니듯 하였다하며 말이 물을 마신 나루(如飮津)를 여음 또는 음진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용마가 죽자 기념하기 위하여 파평산 치마대에 철마를 만들어 세웠으나 조선조시대 철공(대장간)하는 사람들이 이를 사용하고자 훔쳐 달아나다가 직사하였다 하며 후한이 두려워 흙으로 다시 만들어 세웠다하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서기 1117년(고려 예종 12) 여진을 평정한 공으로 추충좌리평계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 지군국 중사(推忠左理平戒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 判尙書 吏部事 知軍國 重事)가 되어 943년 왕건태조가 승하 혜종이 왕위에 오르자 윤신달은 삼남지방을 평정하기 위해 대도독으로 임명 경주(東京)대도독부(大都督府)에 52세에 부임되었으나 30년만에 다시 돌아와 81세로 서거하니 태사 삼중대광으로 추증하고 경주 기계현 아치동(현 영월군 기계면 봉래동)에 구봉산 사원(四原)에 국장을 지냈다 한다. 조선조 영조 대왕시 경주 유림들이 봉강서원을 건립 매년 향사를 지내고 있던중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으로 폐철된 후 자손들이 묘옆에 묘사를 건립 매년 음 10월 1일과 한식일에 전국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다.   

질문[설화] 여음탄(如飮灘)에 얽힌 설화

  파평면 장파리 리비교 위쪽에 돌거리(石浦) 나루(또는 용산나루)가 있는데 나루 위쪽은 바위들이 깔려 있어 얕아서 사람이 건너갈 수 있는 곳으로 맑고 맑은 시냇물을 마시었다하여 여음탄이라 한다. 괴뢰군 김신조가 임진강을 도강할 때도 이곳을 30명이 건너왔던 지역이다. 파평 윤씨 시조 윤신달이 금파리집에서 송도로 통행할 때 이 나루를 이용하였다 하며 말을 타고 건널 때 강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무사히 건넜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 [설화] 장자못(長者池)에 얽힌 설화

 적성면 장좌리 장자못 마을에 옛날 송씨(宋氏)라는 큰 부자가 살았는데 인색하고 포악하기 그지없어 동리사람은 물론 인근 주민들에게도 인심을 잃고 살 뿐 아니라 중이나 걸인에게도 괄세가 심하였으며 시주나 동정을 모르는 몰염치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다. 그러던 중 어느날 도승이 나타나 시주를 청하니 역시 거절하면서 시주할 쌀이 어디 있느냐며 말똥이라도 갖고 싶다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 말똥이라도 달라고 하니 송씨는 말똥을 도승의 시주그릇에 넣었다. 그것을 부엌에서 보고 있던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하는 행위가 너무나 마땅치 않아 시아버지 몰래 쌀 한 말을 퍼가지고 나와 시주를 하였다. 중은 시주를 받아들고 며느리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아울러 당신의 귀중한 물건을 빨리 가지고 나오라 하니 며느리는 허둥지둥 바둑강아지를 데리고 나왔다. 중은 며느리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나를 따라 오라며 임진강을 건너 고랑포에 이르렀다. 그때 뒤에서 천지가 진동하며 벼락소리가 들려 며느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며느리와 강아지는 그대로 화석(化石)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지며 그 화석은 고랑포 어귀(연천군 백학면 고랑포 4리) 방앗간 옆 김씨 보살 할머니가 1간의 담집을 건립 오랫동안 수호하던 중 6·25동란에 흔적이 없어졌다고 한다.또한 큰부자로 살던 송씨 일가는 벼락을 맞아 온데간데 없어지고 큰 연못이 생겨 오늘까지 장자못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연못은 적성면 장좌리 479번지 5,898평의 크기로 옛부터 국유지였으나 1964년 12월 14일 파평면 금파리 423번지 이재식(李在植)씨가 보존 등기를 하여 1974년 7월 1일 국방부에서 이전되었다. 이는 수백척되는 방대한 연못이며 옛날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 하며 이무기가 나와 소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장좌리 거주 안병덕 이병성제보)   

질문[설화] 장계(場溪)와 우계(牛溪)에 얽힌 설화

 한반도 심장부의 동서로 흐르는 젖줄인 맑고 맑은 임진강은 옛날 한양과 송도와의 중간 지점이며 선비와 학자들이 자주 찾아와 낚시와 시조를 읊고 즐기며 세월을 보냈던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밤중에 어화(魚火)의 등불을 비치며 오르내리는 고기잡이배들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경이라 하겠다. 이런 가운데 파평면 두포리 장계(場溪)마을에는 옛날 상선배가 오르내리며 쉬어 가던 곳으로 시장이 번창하였다 하며 지금까지 장계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 뒷산을 파평산 끝머리에 위치하였으나 이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 근처에 많은 소(牛)들이 풀을 뜯어먹었다 하여 소개울이라 칭하고 있다. 이 소개울은 조선시대 유명하였던 대학자이며 효자인 청송성수침(聽松成守琛)선생이 벼슬을 마다하고 한양에서 중종39년(1577) 9월에 아들 성혼(成渾)과 더불어 이곳에 낙향하시어 학문을 연구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시던 곳이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 선생과 교우(交友)을 맺은 아들 성혼선생은 호(號)를 묵암(默菴) 또는 우계(牛溪)로 부르게 되었다. 이 분들은 바로 우리고장 문장을 권장하신 선구자로서 성리학에 유명한 대학자들이시다. 또한 웅담리에서 내려오는 눌노천(訥老川)과 소개울이 합류하여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어귀는 성담수(成聃壽)선생이 단종1년(1451)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1457년 조카 단종대왕을 죽일 당시 이를 못마땅히 여겨 교리(校理)벼슬을 버리고 단종1년(1451) 이곳으로 내려와 몽구정(夢鷗亭)이란 정자를 건립 시와 낚시로 애처로운 단종을 사모하며 세월을 보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설화] 설인귀(薛仁貴) 장군 유적의 설화

 설인귀는(613~682) 용문출신으로 서기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군졸을 응모 안시성 공방전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발탁된 후 655년 영주도독 정명진 좌우위중랑장 소정방과 고구려 적봉진을 침략 658년(보장왕 17) 우령군중랑장으로 승진되어 주장 이세적과 육군을 이끌고 봉천을 함락시켰으며 이어 제성을 공략하였다. 666년(보장왕 25) 고구려장수 막리지와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의 장남 남생이 아우 남건, 남산에게 쫓겨 그를 입당시킨 사실과 신라에서 구원병을 청하자 좌무위장으로 요동안무대사 契芯何方을 도와 내침 남건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함성을 협공 드디어 남산은 중신 등과 당영에 나가 항복함에 따라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9월 21일 역사적인 최종의 치욕일(始祖 朱蒙으로부터 28왕)로서 705년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 설인귀는 검교 안동도호부 총독이 되었다. 648년 이때 신라무왕(제30대왕)의 의도(意圖)를 책망하는 장문을 보내자 진덕여왕(38대왕)은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이남 백제 토지를 모두 그대에게 주어 편안하게 하려한다는 내용에 변명서를 보내 왔으며 신라의 정당한 요구에 대변을 삼았다. 이리하여 신라는 백제땅을 대부분 점령한 후 설인귀는 671년(신라문무왕 11) 계림도 행군 총관으로서 신라에 내침하였으며 이어 675년(문무왕 15) 신라 숙위학생 풍훈을 향도로 삼아 풍성강을 침공하였다. 연이어 나장문훈에게 대패 이듬해 문무왕 16년 11월 금강하류 소벌포에서 거듭 패전 후 678년(문무왕 17)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무순(봉천)으로 이치함으로 나당간 무력 충돌이 종식되었으며 설인귀는 그 후 본위대 장군이 되어 평양군공에 봉해졌다 한다. 그동안 조사한 전설에 의하면 설인귀장군은 적성면 주월리 백옥봉하 오환면적오제갈지에서 가난한 집에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명기한 용문은 바로 이곳인지도 모를 일이다. 설인귀는 구척 장신으로 어려서부터 기골이 수려하고 힘이 센 장사로서 당시 세도가인 상산김씨묘를 쓸 당시 술을 세동이나 마시고 난 후 아름드리 나무들을 캐내는데 무밭에서 무 뽑듯이 하였다 한다. 그 후 율포리 임진강변 벼랑에 갔을 때 석벽에 있는 바위가 갈라지면서 용마가 뛰어나와 말을 타고 감악산 천왕봉하 백운동을 가니 밭을 갈던 농부가 쟁기에 걸려 캐낸 큰 궤짝속에서 갑옷과 투구를 얻었으며 백운대 삼태봉(4체봉) 칼바위에서 보검을 얻은 후 무건리 골짜기에서 감악산을 오르내리며 군마훈련을 익혀 무훈을 세웠다하여 무건리로 호칭하였다. 또한 첫 새벽과 저녁으로 주월리 집에서 두지리를 거쳐 마제리로 호칭하였고, 설마치 계곡에서 설인귀가 가지고 놀던 집더미같은 공기돌 등등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이와 같은 유래를 상고해 보면 서기 612년(영양왕 23)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수륙양군 113만 3천 8백여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장군이 거짓 항복하여 적장 우문술, 우중문을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 회군 할 것을 종용한 후 살수(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수나라 후군을 맹격 30만 5천여명 중 2천 7백만여만이 돌아가게 하였다는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무서운 장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645년(고구려 보장왕 4)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을지문덕 막하에서 미움을 사게 된 설인귀장군은 당태종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이를 구원하여 입당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또한 그 후에도 나당 연합군을 인솔 이곳을 자주 찾았다 한다. 그가 죽은 후 설마치 고개 길가에 옛날 주민들이 세운 설인귀 추모사적비가 있는 곳을 수령들이 지나갈 때 말이 가질 않아 하마하여 절을 한 후 통과하였다는 설도 있으며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불결하게 되자 감악산하 7개 부락에 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현몽하기를 호걸이 장대한 흰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 소를 하루밤만 빌려 달라고 한 후 사라지자 이상히 생각한 소를 가진 여러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외양간에 소를 보니 소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하며 설마치 고개마루(현 양주군 남면 황방리)에 있던 이 화신비석이 감쪽같이 감악산정(해발 675m)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설인귀 사적비 단은 높이 170cm, 두께 19cm, 넓이 70~79cm의 화강암으로 상위가 하위부분보다 약간 넓은 편이며 기단은 자연석 1장으로 4단이 형성되어 있다. 고려때에는 봄가을 조정에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在紺嶽山頂一問隆香祝致祭)를 지냈다하며 감악산신으로 봉했다는 전란사와 민간 신앙조에 기술된 사실과 현종 5년 거란이 침입 당시 감악산사에서 병마와 깃발이 나부꼈다는 설 또한 고려 충렬왕 13년 6월 그의 두 왕자에게 도만호의 관직을 주어 감악산신에게 음조를 기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산신으로 봉해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 적성군지 고려조에 의하면 육계토성에서 설인귀가 태어났고 이의신이 설인귀비를 발견하였다 하였으며 충렬왕 3년 4월 감악산에 친제를 지내려다가 두지진에서 익사한 사건과 조선조 태종 11년 6월에 산제 봉행과 연산군 6년 2월 감악산 신당 보수 등으로 미루어 보아 설인귀장군 추모비이며 본 고장 출신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근년에 이 비석을 군작전상 철거를 하였더니 자주 사고가 난다하여 이 자리에 다시 세우니 무사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각계 각층의 학자들도 이 비석에 의아심을 품고 유적을 세밀히 조사한바 너무 오래되고 비와 풍화작용으로 글자가 보이지 않아 봉전몰자비 또는 빗뚤대왕비, 진흥왕 순수비 등 구구각색으로 논란이 많다. 이는 앞으로 좀더 연구하여야 할 숙제라 하겠다.   

질문[설화] 덕진당(德津堂)에 얽힌 설화

  대감마님 말을 대령했습니다. 떠나실 시각이 지났사옵니다.” 밖에서 상노의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단부사 이서가 아내의 손을 놓고 일어서서 아내가 내미는 큰칼을 받아 드는 순간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니 아내의 눈에 근심스러운 눈물이 가득 고여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이어서 아내의 두 손을 꼭 모아 쥐니 아내의 눈에 무한한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었고 뇌리에는 지난날의 무수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내의 눈빛과 표정은 사랑과 존경으로 빛나고 있었으나 감출 길 없는 불안한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있었다. “부인! 염려할 것 없소. 나라를 위해 싸움터에서 죽는 것이 무인의 본분이오. 비록 외적과 싸우는 것은 아닐지언정 반정을 도모하는 것이 나라와 사직을 위함이니 어찌 두려워 하겠소.” “광해군의 폭정이 더 지나치게 되면 사직과 백성은 헤어날 길 없는 도탄에 빠질 것이요. 내 반드시 반정을 성사하겠소.” “그리하오나, 나으리, 일의 성패는 고사간에 이제 다시는 뵈올 수 없을까 염려 되옵니다.” “부인 반드시 돌아오리다. 일이 성공하면 돌아오는 나룻배에 붉은 기를 달겠소.” 이서는 잠시 말을 끊었다.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지긋이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부인 만약에 일이 실패할 경우에는 나룻배에 흰기를 달겠소. 부인은 지체하지 말고 아이들 데리고 피하시오.” 이서는 말을 마치자 돌아서 방을 나왔다. 문 밖에는 부장과 상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서는 버선발로 뒤따라 뛰쳐나온 아내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에 올라 채찍을 내리쳤다. 아내는 중문 기둥에 몸을 기대고 멀어져가는 말발굽 소리에 귀를 모으니 갑자기 가슴속이 공허해졌다. 하늘과 땅사이에 혼자만이 남아 있는 것 같이 아득한 허공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아내는 전신의 힘이 말려드는 것을 느끼면서 가눌길 없는 몸이 풀썩 쓸어졌다. 이 모양을 지켜보던 계집종이 기겁을 하고 뛰어왔다. 때는 광해군 5년 삼월 열사흘의 밤 영창대군을 스스로 강화섬에서 죽게하고 생모 인목대비를 가두고 폐모함으로 해서 광해군은 스스로 반정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서를 비롯한 김유, 이괄, 이귀, 김자겸, 최명길 등은 김유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을 옹립하는 반정을 일으켰다. 아내를 작별한 길로 휘하의 칠백군병을 이끌고 임진강 덕진나루를 건너 질풍처럼 병사들을 휘몰아 고양군 면서역에 도착한 이서는 김유가 거느린 육백의 군사와 합류하여 창의문을 향해 진격했다. 제 정신을 차린 아내는 목욕 재계하고 소복으로 갈아 입고 뒷뜰에 있는 단을 모아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아내는 한 차례 기도가 끝나면 나루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올라 남편이 돌아올 뱃길을 지켜보았다. 칠일이 가고 열흘이 지나도록 남편의 소식은 없어 아내는 뒷뜰에 모은 제단과 언덕을 하루에도 수 없이 왕복하였다. 아내는 침식을 잃고 기도에 열중하니 수척해진 아내의 얼굴에는 어느덧 절망이 짙게 드리웠다. 이제 삶에 대한 의욕보다 남편의 생사를 알고 싶을 뿐 차마 남편의 생사도 모른채 죽을 수는 없었다. 아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남편의 거사는 실패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어쩌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아내의 전신에 오한이 스치면서 남편의 몸에 내려지는 무수한 채찍이 아내의 몸을 마구 때렸다. 몸과 마음이 갈갈이 찢기는 아픔과 함께 아내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신음소리가 아내의 가슴을 마구 찢었다. “부인 나, 나를 좀 살려주오. 이 묶인 오라를 풀어주오.” 그러나 아내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남편의 묶인 오라에 손이 닿지를 않았다. 아내가 기다리면 남편은 그 만큼 먼 곳으로 물러갔다.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아내는 자기 자신의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전신에 땀이 젖어 있었다. 계집종이 근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마님, 정신이 좀 드셔요?” “오냐, 그런데 꿈이 이상하구나, 아무래도 나으리께서는 실패하셨나 보다. 차라리 나도 이대로 나으리의 뒤를 따르려 한다. ” “마님, 그 무슨 경망된 말씀을 하셔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 더욱 소식없는 것이 좋은 징조라고 옛말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아무래도 꿈이 심상치 않구나.” “아니요 마님 몸이 너무 허약해 지셨기 때문에 악몽을 꾸신 거예요. 몸을 보호하셔야겠어요. 병나시겠습니다.” “그랬으면 오죽 좋으랴. 아니야, 너는 상노와 함께 언덕에 올라가 보고 오너라. 나으리의 배가 올런지도 모르겠구나 하, 꿈이 이상하여 견딜 수가 없구나.” 아내는 계집종이 미쳐 방문을 나가기 전에 다시 불러 세웠다. “아니다, 내가 가야겠다. 내가 가서 직접 내 눈으로 보아야지.” 아내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반만 일어선 몸은 힘없이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내는 병을 앓아 눕게 되었다.병석에 누운 아내는 헛소리처럼 남편을 찾았다. 그러나 무심한 것은 세월이었다. 쌀쌀하던 이른 봄의 바람이 훈훈한 봄바람으로 변하여 뜰앞에 꽃봉오리가 맺혀도 남편의 소식은 없었다. 어언 남편이 떠난 지도 한달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마님, 약을 드셔야지요.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오늘은 상노 아이를 한양으로 보내서 소식을 알아 오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서 약을 드시고 힘을 내셔요.” “약은 먹어서 무얼 하겠느냐 상노 아이에게 눈칫껏 일러야 하느니라.” “네, 눈칫껏 일렀습니다. 그러하오니 어서 약을 잡숫고 힘을 내셔요.” 아내는 상노 아이를 보내고 새로운 기다림으로 해서 얼마간의 힘을 얻었다. “깃발이 보이느냐?” “마님, 깃발이라니요?”“나으리께서 돌아오시는 뱃길에 깃발을 세우기로 하셨다. 깃발이 보이느냐?” “깃발의 빛깔이 어떠하냐?” “마님, 아직은 멀어서 잘 알 수 없으나 붉은 깃발인가 합니다.” “붉은 깃발! 아, 천지신명이 무심치 않았구나, 일이 성사되어 돌아오시는 것이다.” 아내의 얼굴이 활짝 생기가 돌았다. 아내는 한달음에 언덕 끝까지 뛰어가 나룻배를 지켜보았다. 나룻배는 강심을 벗어나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집종은 다가오는 나룻배의 깃발이 붉은기가 아닌 것을 보았다. 깃발은 흰빛이었다. 계집종은 망설였다. “마님, 기가 보입니까?” “아니, 아직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분명히 붉은기라 했지?” “마님, 그러하오나...” 계집종은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말을 잇지 못하느냐?” “실은, 이제보니 깃발은 흰빛입니다.” “흰기?” 아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흰기! 하늘이 너무도 무심하구나! 하늘이 버리시다니!...” 아내는 뜻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실신한 걸음으로 낭떨어지를 향해 걸어갔다. 계집종이 붙들기 전에 아내는 낭떨어지 밑으로 몸을 날렸다. 푸른 물결의 포구만이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장단 석벽을 치고, 이서는 상노아이의 전갈을 받고 서둘러 돌아왔다. 아내가 투신한 것을 들은 이서는 계집종을 돌아보며 까닭을 물었다.“어찌된 일이냐?” “대감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깃발이 희다고 여쭈었더니 그만 마님께서 강에 몸을 던지셨습니다.” “무엇! 깃발이 희다니? 네 눈에는 붉은기가 어찌하여 희게 보였다는 말이냐?” 계집종은 말을 잃었다. “대감마님, 실은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갑자기 사공이 땅에 엎드려 이서를 쳐다보았다. “너는 왜 그러했느냐?” “소인이 하도 더워서 저고리를 벗어 걸었습니다. 기가 저고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감마님,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이서는 묵묵히 상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이서는 아내가 몸을 던진 언덕에 덕진당이라는 재각을 짓고 원혼을 위로하였다. 지금도 임진강 강가에 사는 어부들은 풍어나 수재를 막기 위해 덕진당에서 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십대손인 이서는 그 뒤에 완풍부원군에 이르고 벼슬은 호조판서, 경기관찰사, 호위대장, 수어사에 이르렀다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의 진중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    

질문[설화] 은 생매장에 얽힌 유적의 실화

 38선을 경계로 시름없이 흘러 눈물이 서린 한많은 임진강 물결, 이 강변 산기슭에 또 하나 원한의 보금자리가 있으니 이는 곧 무자비한 북괴도당 만행지이다. 애국 무명용사 97명이 한 구덩이에서 나란히 무차별 전기줄로 묶인 채 따발총으로 학살된 영령들이 아직까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쳐 울며 통곡하고 있는 이 땅, 오호라 35년이 되는 오늘날 아무런 표식조차 없으니 한심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파주의 유일한 유적이요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산 반공 교육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 문화원에서는 학살자 조사를 착수 그의 연고자와 사망자들을 여러 인사들의 제보 협조로 1개 성상을 거쳐 완벽한 실태를 파악 조사를 완료하였으며 위령탑이라도 현지와 통일공원에 세울 것을 추진 중에 있다. 이러한 가운데 1984년 6월 9일 제2회 교정대상 수상자 다과회에서 6·25당시 공산당에 의해 집단학살된 장소를 찾아내 추모기념물을 건립하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국방송공사가 주관이 되어 내무부를 비롯한 관계 기관과 협조 6.25 대학살 영령추모사업을 계획 추진 전국적으로 시민들의 제보를 226건에 달하는 학살 현장을 찾아낸 후 추모사업 중앙추진위원들로 하여금 우선 14개 지역을 확정 85년 5월 20일 6·25사변 36주년을 맞이하여 일제히 똑같은 비각과 시설로서 제막식을 같게 되었다. 이에 따라 두포리 산39번지에 무참히 쓰러진 영령들의 원한이 다소 위안이 되어 눈을 감게 되었다. 조길산씨(파평면 두포리 439 당 78세)증언 9·28 탈환 당시 40여 세대가 이곳 장깨부락에서 살고 있었으며 전황이 긴박해진 북괴군은 문산 내무서에 가두었던 애국 청장년들을 전기줄로 손을 묶어 이길로 데리고 오다가 일부는 파평면 분주소에 이 지역 몇몇 사람들과 함께 100여명이 감금되었던 것으로 알았으며 후퇴 끝머리에 자신도 피신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다며 얼마 후 집에 와서 있는데 팔을 어깨에 달아맨 낯모른 사람이 찾아와서 쇠스랑을 빌려 달라고 하여 사연을 물은 즉 97명이 묶여오다 내자식 둘과 모든 사람들이 저 산기슭(두포리 산39번지) 반공호에 괴뢰군 따발총을 맞고 피살 당하였으며 나만 팔 관통상을 입고 죽은 척하니 다 죽었다면서 달아나 구사일생으로 혼자만 살았다고 눈물을 흘려 즉시 산으로 쫓아가 보니 과연 교통호속에는 분간도 할 수 없는 시체가 널비하게 있고 냄새가 코를 찔러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후 몇몇사람의 시체는 찾아갔으나 대부분 그대로 시체가 묻혀 있다며 바라만 불면 이 장깨부락 사람들이 이리저리 피해 다녔으며 수 개월 동안을 살 수가 없었다면서 1·4후퇴 당시 이 부락이 전부 소실되었고 현재 그 일부는 밭이 되었다고 하였다. 임성빈씨(파평우체국장 당69세)증언 1950년 9월초 지방유지 및 우익 애국자들을 모조리 체포한다는 소문을 들은 본인은 집에 있을 수 없어 덕천리 거주 남궁봉을 찾아가 뜻을 같이 할 동지들로 하여금 유격대를 조직 파평면 분주소를 습격하자고 상의한 후 윤수철, 장용환, 이근봉, 윤수만, 윤수현, 낙오병 성명 미상 3명 등 10명이 규합 늘노리 느리골 산골짝 외딴 집에 사는 이은창 집에 은신 우선 먹을 것을 마련하려 하던 중 덕천리 오세준 집에 괴뢰군이 군량미를 보관시켜 놓았다는 정보를 입수 본인이 몰래 오세준을 만나 쌀 두 가마만 달라고 요청한 즉 인민군이 알면 나는 죽는다면서 거절 그럼 우리 손에 죽겠느냐고 하자 승낙이 되어 그날 저녁 사람을 보내 쌀 두 가마를 가지고 와서 식량문제는 해결되었으나 무기확보를 하여야 한다는 굳은 결의 끝에 괴뢰군 퇴각로변 숲 속에 은신 무장 괴뢰군 2명을 발견 급습 사살하고 따발총 2점을 획득하였으며 또 며칠 후 괴뢰군 5명을 발견 집중 습격 3명이 도주 2명을 사살 장총과 따발총 2점을 노획하여 돌아와 분주소 습격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괴뢰군에게 전세가 불리하게 됨을 알고 있는 부역자 김영성은 본인을 은밀히 찾아와서 우리 형제 가족들은 다 죽게 되었다며 애원함으로 분주소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너의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였더니 그날 저녁 형제가 와서 사살묘책을 사정하게 되어 이를 가긍히 생각하고 그럼 분주소장 이하 직원을 사살한 후 우리와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으나 행동이 수상한 김영성을 눈치챈 그놈들이 모진 고문을 하자 사실대로 고백하였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유격대들은 이미 해산 각자 은신하고 있던 중이었으나 본인의 처 이귀순(35세)을 연행 모진 고문을 하고 음력 8월 31일 두포리 산39번지 임진강변 도로 옆 산기슭에 있는 교통로에서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총살되어 9·28탈환 후 시체를 찾아 장래를 치루었으며 면내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동지들을 규합 치안대를 조직 전념하다 경찰 복귀 후 모든 장비 기구를 인계하였다고 한다. 조동숙선생(금촌읍 금촌리 395 당61세)증언 48년 4월 14일 임종관씨 차남 임동욱과 결혼 교직생활을 하였으나 결혼 2개년이 지난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남편과 더불어 이리저리 은신하고 있던 중 9·28탈환이 되어 다소 마음에 안정을 가진 찰라 반공호에 은신하고 있는 남편 임동욱과 시아버님 임종관, 시동생 임동철을 10월 2일 밤12시 괴뢰군들이 갑자기 몰려와 부락애국지사 수명과 함께 연행하게 되었다. 그후 초조감에 잠긴 본인으로서는 아무런 죄가 없어 즉시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나 수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이리저리로 수소문하니 전세가 불리하게 된 괴뢰군은 아동면 분주소에 연금된 수많은 애국지사 전부를 문산 내무서에 연행되었다는 말을 들은 후 소식을 몰랐으나 며칠 후 시아버님이 팔관통상을 입고 돌아와서 사연인즉 97명중 나 혼자 구사일생 살게 되었으며 전부 두포리 산39번지 교통로에서 학살당하였다고 하자 인근 주민들과 함께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한다. 이로 인하여 이튿날 피살자 가족이 몰려가 시체를 찾아 장사를 치루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시체가 부패되어 누군지 구분을 못해 낯익은 옷 또는 혁대등으로 일부만이 시체를 찾아 왔다하며 거의가 그 자리에 묻혔다 한다. 그러한 가운데 시아버님은 1961년 1월 28일 원한을 씻지 못한 슬픔을 안고 환갑되는 해 돌아가셨으며 조동숙선생은 애처로운 남편의 죽음에 일구월심 한이 맺혀 수절할 것을 결심 아직까지 홀로 교직생활에 몸바쳐 학생들의 벗이 되어 마음을 달래며 90세 된 친정어머님과 양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고 있어 인근 주민들은 칭송이 자자하다.제보자 성명 김갑동 금촌읍 맥금리 103황춘식 금촌읍 금촌리 395 이봉림 금촌읍 맥금리 474 이영실 문산읍 문산리 98 심재웅 월롱면 도내리 660 황오주 문산읍 선유리 6 이재성 금촌읍 금촌리 394이경섭 천현면 법원리 10      

질문[일화] 송천 최흥원 우국충정과 청백리정신의 일화

 선조 대왕시절에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은 중종 24년 1월 5일 한성부 목멱산하 훈도방 (木覓山下薰陶坊)현 정동, 필동부근에서 영천부원군 최수진(寧川府院君 崔秀珍)의 아들로 태어나 기풍이 특이하여 10여세 당시 문사가 대성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며 이준경(李浚慶)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증조 영의정 최항(崔恒)께서는 세종대왕 시절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참여하였으며 조부 좌찬성 최영호(崔永灝)는 대대로 명문가문에서 자라서 명종 10년(1555)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호조좌랑을 거쳐 상의원 판관으로 전임되어 명종대왕이 승하하자 궁중상례를 충실히 치르는데 한치도 소홀함이 없었으며 선조 1년(1568)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로 있을 당시 퇴계선생(退溪先生)께서 공의 성품이 온후하고 겸손하여 효성이 지극함과 아울러 친척간에 화목하니 뒷날 크게 경사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한다. 선조 2년(1569) 호조정랑을 거쳐 예조정랑으로 있을 당시 명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와 사간원 정원 홍무관 옥당등을 역임하고 선조 8년(1575) 동래부사로 부임 청렴결백한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하며 부승지로 승진되었다가 황해도 관찰사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승진 재임 중 선조 16년(1583) (율곡선생이 해주에 있을 당시) 황해도에 큰 흉년이 들어 굶주려 쓰러지는 자가 많게 되자 이러한 참상을 볼 수 없다면서 전감사로 있던 송천 최흥원(松泉 崔興源)이 아니면 수습하기 어렵다고 조정에 상소하니 할 수 없이 도승지로 재임하다 다시 황해도 감사로 부임 굶주리고 병든 사라들을 내 가족같이 온정을 베풀어 편안히 살도록 하였다. 선정에 감흥한 여러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칭송이 자자하니 그 사실을 전해들은 임금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대상을 내리었다 한다. 이에 중추원사 한성부 좌윤을 거쳐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선조 21년(1588) 평안감사와 개성유수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겸 의금부지사 사헌부 대사헌 형조판서등을 두루 거쳐 선조 24년(1596) 이조판서겸 경연지사 병조판서에 이어 의정부 좌참찬이 되었다. 선조 25년(1597)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대왕은 송천 최흥원을 불러 경기 황해도 순찰사에 특명을 내리니 즉시 서울을 떠나 해서로 가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서도 파천에 대비하였다.드디어 4월 29일 선조대왕은 서울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송도에 이르니 어영대장 윤두수(御營大將 尹斗壽)가 지략과 재량이 풍부한 최흥원을 우의정으로 기용토록 임금에게 진언하여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64세에 영의정이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드디어 평양성이 함락되는 동안 어가는 매우 황급하게 되어 요동(중국)으로 건너갈 결심으로 의주로 떠날 때 송천공은 강계로 가서 보조행군토록 하는 한편 종묘사직을 봉안 18세되는 동궁(임해군)을 호위하고 운산, 하천, 맹산, 양덕,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 다시 선천, 용강에 이르렀다. 이러한 병란으로 어수선한 정사에 시달리면서 군량 확보와 의병 선동 등을 지시하면서 명나라 지원군 요청으로 교묘한 정책을 펼치는 동안 명나라 이여송 제독(李如松 提督)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들어와 평양성이 수복되어 선조대왕께서 의주에서 정주에 머무르게 되자 임금님을 여기에서 영접하고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리어 위안하였다. 또한 이천과 선천에 유숙하면서 분조를 차리고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도록 각지에 격문을 띄워 민심을 수습시키자 충의에 감동한 의병들이 각지에서 소매를 걷어 부치고 일어났다. 이때 이일(李鎰)과 이빈(李賓)에게 명하여 의병장 고충경(高忠卿)과 연합하여 평양 동북방 10여리 지점인 임원평에 진을 치고 왜적과 대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여송 제독이 임진강을 건너 본군 관하 용미리에 주둔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아우 이여백과 이여매를 잃고 참패를 당하여 평양으로 후퇴한 후 움직이지 않아 할 수 없이 송천공은 의주로 가서 명나라 지원군 사령관 병부시랑 송응창(兵部侍郞 宋應昌)을 만나 예의를 갖추고 왜적을 빨리 격퇴하여 실지를 회복시켜 줄 것을 간청하니 이에 감복하고 병사를 정비하여 맹격을 감행 선조 27년(1599)에 서울을 탈환하니 서울을 떠난지 2년만에 선발대로 송천공이 입성하여 폐허가 된 성내를 순회하면서 전란에 시달린 난민을 위로하고 정성을 기울여 구제에 온갖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환란속에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전심전력을 기울이다 몸은 지칠대로 지쳐서 중태에 이르렀다. 이때 선조께서는 7월 1일 환도하시매 영접을 마치고 나서 이제 상감께서 돌아오셨으니 내가 죽어도 한이 없다면서 사임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누차에 걸쳐 진언하니 마지못해 판중추부사로 있게 하는 한편 세자시 강원빈객으로 요양하면서 국가대사에 참여 의논토록 하였다. 선조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적이 또다시 침범하자 왕명을 받고 중전을 배호하여 황해도 수안에 유루하였다가 전란이 평정된후 3년만에 돌아와 영중추부사를 재임하였다.선조 36년(1608) 2월 16일 75세로 세상을 떠나시니 파주시 아동동 학령산하에 예장으로 모시고 동년 9월 1일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충정(忠貞)으로 시호와 충근 정양 알성 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謁誠效節協策扈聖功臣)과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훈되었으며 장남 좌찬성 최산립(左贊成 崔山立) 차남 한성좌윤 최순립(漢城左尹 崔順立) 장손 좌의정 최윤조(左議政 崔胤祖) 차손 봉직랑 최윤서(奉直郞 崔胤緖) 사위 직장 송흥조(直長 宋興祚) 사위 현감 이춘향(縣監 李春鄕) 사위 현감 유순등 송촌공의 명에 따라 구국전선에 앞장서 군량수집과 아울러 왜적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운 일가족 모두 호성원종 공신(扈聖原從功臣)에 녹훈되니 선조께서는 구국충절과 청백고결한 지조를 높이 찬양하여 청백비를 특별히 하사하시었다. 그러나, 공께서는 내가 죽은 후 이름 삼자만을 비석에 남기라는 유언이 따라 묘전에 묻어 두었으나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수차에 걸쳐 난시로 말미암아 후손들이 잊어버리고 있던 차제에 해방후 부대가 주둔하면서 이 청백비와 용각만이 발굴되어 보존될 뿐 거북바탕을 찾지 못해 안타까운 실정이며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드문 문향의 고장 파주의 문화유적이라 하겠다. 임진왜란 당시 최흥원은 도순찰사로 부임하여 왜적들은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함경도 일대를 침범하게 되는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장자 황해도 서흥 도호부사(都護府事)와 차자 평안도 자산군수(慈山郡守) 삼부자가 교묘한 전략계획을 세워 민심을 수습 위무하는 한편 곡물을 모아 군량을 확보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선동 모집하는 등 왜적을 격퇴하는데 혁혁한 전과를 올려 국토회복에 몸바친 삼부자 삼충신(三夫子 三忠臣)이라 전해지고 있다.▷ 장 남: 山 立 : 戶曹參判, 寧安君, 贈 左贊成, 扈聖原從功臣 1等 ▷ 차 남: 順 立 : 慈山郡守, 贈 漢城左尹, 扈聖原從功臣 3等 ▷ 장 손: 胤 祖 : 祥原郡守, 贈 左議政, 扈聖原從功臣 3等 ▷ 차 손: 胤 緖 : 從仕郞, 贈 奉直郞, 扈聖原從功臣 3等 ▷ 큰 사 위: 宋興祚: 直長, 扈聖原從功臣 3等 ▷ 둘째사위: 柳 焞 : 縣監, 扈聖原從功臣 3等 ▷ 셋째사위: 李春馨: 縣監, 扈聖原從功臣 3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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