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문화재

파주 삼릉

지정번호 :
사적 제205호
지정연월일 :
1970년 5월 26일
소재지 :
조리읍 봉일천리 산 4-1, 15-1
소유자 :
국가
조성시기 :
조선 전기 세조 7년, 조선 전기 성종 5년(1474), 조선 후기 영조 27년(1751)
규모 :
재료 :

문화재 설명

공릉恭陵

조선 8대 왕 예종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한명회韓明澮의 셋째딸로 1460년(세조 6) 열여섯 살 때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인성대군을 낳고 이듬 해 열일곱 살의 나이로 승하했다. 1462년 세조는 죽은 왕세자빈에게 온순하고 너그러우며 아름답다고 장, 어질며 자애롭다고 순의 장순章順이란 시호를 내렸다. 1472년(성종 3)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공릉은 처음에 왕후의 능이 아니라 세자빈의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소박하다. 곡장을 두른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생략되어 있고, 석호와 석양도 각각 두 마리*만 능을 보호하고 있다. 또한 봉분 앞에 망주석은 없고 혼유석과 팔각의 장명등만 세웠으며, 좌우 양쪽에는 무인석은 없고 손에 홀을 쥔 문인석과 석마를 두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공릉의 참도*는 다른 능과 달리 꺾여 있다.

순릉順陵

조선 9대 왕 성종 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넷째 딸로 공릉의 장순왕후와는 자매간이며, 성종은 예종의 조카다. 그러나 이들 자매는 궁에서 함께 지낸 적은 없다. 공혜왕후는 언니 장순왕후가 죽은 지 6년 뒤인 1467년(세조 13) 열두 살의 나이에 자을산군者乙山君과 가례를 올렸고 자을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더불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5년 후인 1474년 4월 열아홉의 나이에 자식 없이 승하했다.
순릉은 화려하지 않지만 왕비의 예에 맞추어 만들어졌다. 병풍석만 생략되었을 뿐 왕릉에 있어야 할 석물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궁궐의 담장을 본떠서 만든 곡담이 봉분을 보호하고 있고,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의 석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석호 네 마리와 석양 네 마리가 무덤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귀신 얼굴 모양을 새긴 북 모양의 고석鼓石을 괴고 있는 혼유석과 양 옆에 불쑥 솟은 망주석이 있다. 돌로 만든 단을 하나 내려오면 장명등과 석마를 뒤에 거느린 문인석이 양쪽에 서 있고, 그 아래 단에는 조선시대에 문인보다 서열이 낮았던 무인석이 석마를 곁에 두고 서 있다. 그리고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격식에 맞추어 자리하고 있다.

영릉永陵

조선 21대 왕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진종眞宗으로 추존)와 비 효순왕후孝純王后 조씨의 능이다.
진종은 1719년(숙종 45)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행이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28년 춘추 열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자 시호를 효장이라 했다. 영조는 둘째아들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폐위한 뒤 사도세자의 아들인 왕세손(훗날 정조)을 효장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효장세자는 정조 즉위 후 영조의 유언에 따라 진종으로 추존되었고 능호도 올려 영릉이라 했다.
효순왕후 조씨는 좌의정을 지낸 조문명趙文命의 딸로 1715년에 태어나 열세 살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 세자의 죽음으로 홀로 되었다가 1751년 서른일곱의 나이로 승하했다. 후에 효장세자와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영릉은 세자와 세자빈의 예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간소하고 아담하다. 영릉을 만들 때 영조가 석물들을 옛 방식을 따르되, 일반 가정의 석물에 비해 조금 풍후豊厚한 정도로 할 것을 명하여 그대로 시행했기 때문이다. 영릉은 진종과 효순왕후의 봉분을 나란히 한 쌍릉으로 곡장을 둘렀을 뿐 병풍석과 난간석은 없고 석호와 석양이 각각 한 쌍씩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 각각 혼유석을 두고, 양 옆에 망주석을 세웠다. 그 아래 단에 장명등과 문인석 두 기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