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역사

파주의 인물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문향 파주에서

통일 조국을 열어가는 통일한국의 중심도시로 발전해나가는 파주!

율곡 이이(李珥)

1536(중종 31) ~ 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기념물 제 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에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된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 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568년(선조 1) 2월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직강으로서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우계 성혼과 '지선흥중'과 '안자격치성정지설'을 논하였으며, 11월에는 이조좌랑에 재임중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파면함이 옳다고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비록 외조모라도 정이 간절하면 어찌 안 가볼 수 있겠는가. 효행한 일을 가지고 파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기각하였다. 선조는 1569년 6월 그를 홍문관교리에 임명하면서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뵈러 가는 것이 비록 법전에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이 사람만은 벼슬을 그대로 두고 왕래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시무책으로 알려진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폐단을 개혁코자 하였다. 1570년10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처가인 해주 석담으로 물러나와 문하생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설하는 일을 낙으로 삼다가 이듬해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그 후 이조정랑. 의정부검상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주에 있으면서 고산의 석담구곡을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네번째 굽이의 이름을 송애라고 하고 기문을 짓는 한편, 거기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71년 6월 청주목사로 나가서 청주의 '서원향약'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우계와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1573년 7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경하여 세 번의 상소를 통하여 허가를 받아 8월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서 '감군은'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이나 만족할 것이요. 그러나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이요."라고 하자, 율곡은 웃으면서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응답하였다.

9월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된 후 곧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직하고, 이듬해 1월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를 올려, 정책을 세워도 백성을 구하는 실효가 없다는 등 7가지 시폐를 지적하고 재앙을 막아낼 계책과 진덕하는 공을 말하였다. 1574년 3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그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 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 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지에서 다섯 가지의 큰 폐해를 지적하였고 157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


관련문화유적

◎ 화석정
율곡 이이(李珥)선생의 본향인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花石亭)은 원래 고려말 대유학자 인 길재(吉再)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지나 자세한 문헌기록은 없다.

◎ 이이 선생 묘
이곳은 조선전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묘이다. 자운서원 내에 위치하며 이 묘역을 중심으로 신사임당 묘를 비롯한 가족 묘 13기가 인근에 함께 조성되어 있다.

◎ 자운서원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율곡 이이栗谷(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방촌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정승이자 청백리로 탄현면 금승리에 지방기념물 제 34호로 지정된 묘가 있고, 문산읍 사목리에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대표적인 정승이자 청백리로 탄현면 금승리에 지방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묘가 있고, 문산읍 사목리에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반구정이 있다. 초명은 수노, 호는 방촌, 본관은 장수, 이조참의에 증직된 석부의 증손이고, 의정부참찬에 증직된 균비의 손자이며, 판강릉대도호부사를 지낸 군서의 아들이다.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 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록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389년 (공양왕 1)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 고려조때 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의 직무가 기복시켜 관직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그후 언사로 인해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정종이 즉위하자 다시 문하부우습유에 임명되었고, 1399년(정종 1) 10월 문하부우보궐에서 면관되었다가 그해 2월 복직되는 등 강직한 직언으로 인해 수 차례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경기도도사를 거쳐 내직에 등용되어 형조. 예조. 병조. 이조의 정랑 등을 역임하고, 1401년 (태종 1) 지신사(승정원도승지)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하여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된 후 병조의랑으로 옮겼다가 1402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특별히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고, 1404년10월 우사간대부, 좌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언(좌부승지)에 올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태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정계에 유력자로 부상된 것은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 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 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을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 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책봉된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삼공신이 정계에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당시에 그는 공신이 아니었으면서도 공신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이 일은 나와 경만이 알고 있으니 만약 일이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내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오." 라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1409년 8월 참지의정부사로 승진되기까지 근 4년간 도승지로 재임하는 동안 국정에 커다란 실권을 행사하면서 태종대의 왕권강화와 제도 개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1409년 12월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2월 지의정부사와 7월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고, 1411년 9월에는 병조판서로서 명에 다녀왔으며, 1413년 4월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하였다가 6월에 다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5년 5월 이조판서로 재임중 송사처리에 연관된 문책으로 6월에 파직되었다가 그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직되었다. 그후 1415년 11월에 의정부참찬, 12월에 호조판서를 거쳐 1416년 이조판서로 재임하면서 세자 양녕대군의 폐출을 반대하다가 태종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곧 이어 공조판서로 복직된 후 1417년 2월 평안도 도순무사로서 평양부윤을 겸임하였고, 그해 9월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왕실의 적서자봉작법을 개정하였으며, 1418년 1월 판한성부사에 올랐다.

그해 세자가 폐출되고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다가 서인으로 격하되어 5월에 교하로 유배되었고, 곧 이어 남원에 유배되었다. 그 당시 태종은 그에게 세자로서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양녕대군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세자의 나이가 어리고 과실의 대부분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를 태종은 그가 중립을 취하여 사태를 관망하는 것으로 오인하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도 대간에서는 양녕대군 및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계속하여 탄핵하였으나 상왕(태종)의 오해가 풀리면서 1422년(세종 4)2월 남원에서 소환되어 직첩을 환급 받고 3월에는 과전을 환급받은 후 10월 경시서제조 의정부참찬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1423년 5월 예조판서에 이어 7월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이임하자 관동지방의 주민들이 모두 아쉬워하였고, 특히 1425년 강원도 삼척에서는 중국의 주대에 선정을 베풀었던 문왕의 서자인 소공에 비유하여 그의 행차가 머물렀던 곳에 대를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였으며, 지금도 '정승고개'라고 부르며 유덕을 기린다고 한다.

1423년 12월 판우군도총제부사로서 강원도관찰사를 겸임하였고, 1424년 6월 의정부찬성, 이듬해 3월 사헌부대사헌을 겸대하였다. 1425년 3월에는 남원부사가 보낸 물품을 수뢰한 고위관직자를 조사할 때 조정의 다른 재상들과는 달리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여 당시의 여론이 황희만이 정직하다고 평가하였다. 1426년 2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그해 5월 우의정으로 승진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를 재임 중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가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된 뒤 평안도 도체찰사로 파견되어 낙산성기를 답사한 뒤 약산을 요충지로 판단하고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하여 평안도 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되었다.

좌의정 황희가 교하현령에게 토지를 요구하고 그 대가로 현령의 아들을 행수로 임명하였다는 것과, 감목을 잘못하여 국마 1,000여필을 죽게 한 혐의로 사헌부에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담당관에게 사사로이 부탁한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어 파주의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당시 세종이 그를 파직시킨 것은 일시적으로 대간의 탄핵을 무마하려는 것으로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다. 세종은 그를 파직시킨 지 1년도 안되는 1431년 9월 영의정부사로 승진 발령하였다.

황희는 태종과 세종이 가장 신임하는 재상으로 당대의 왕권 강화와 국정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고, 청렴한 명신으로 청백리의 귀감이 되었다. 소학, 가례, 성리학 등을 즐겨 공부하였지만 뚜렷한 학보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그는 학문적 업적보다는 국정을 수행하는 정치가로서의 성향이 강했다. 6조의 판서를 모두 역임하고, 6년간을 좌우의정으로 재직하였으며, 19년간을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등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동안 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내정 면에서 세자의 강학 요청과 양녕대군 문제, 민무구 등 외척의 문제, 경제육전의 개정, 상정 조례의 논의, 법관의 남형 금지, 소나무의 남벌 금지, 태만한 수령의 처벌 규정 등의 시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방문제와 대외관계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과 구휼을 통한회유책을 동시에 강구하였다. 특히 공조판서 재임 시에는 각 도에 비치한 군사와 군수물을 낱낱이 점검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하였다.

그밖에도 야인 토벌과 4군 6진의 개척, 북방인의 대우문제, 서북토관제의정비, 병마군기의 점검, 봉화의 시행, 강무시의 군복 제정 등을 건의하여 시행케 하였다. 경제면에서도 농사개량에 유의하여 곡식종자를 배급케 하고, 각 도에 뽕나무를 많이 심도록 권장하여 백성의 복식생활을 풍족케 하는 등의 민본정책을 폈다. 그의 이러한 민본적 경제정책은 법률의 개정에도 반영되었다.

종래 원집과 속집으로 나뉘어져 내용이 중복되거나 누락되어 그 내용이 현실적이지 않은 부분을 수정, 보완하여 '경제육전'을 펴냈으며, 과전수세법, 공물문제, 기민의 구제책, 천첩소생의 천역 면제 등 광범위한 대민정책을 펴서 민중생활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하였다. 문화면에서도 우리의 가정생활로부터 국가의 의례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여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즉 집현전을 중심으로 문물을 진흥시키고, 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던 고려의 예법을 명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하여 개정. 보완하였다. 그 밖에도 복제규식으로부터 아악전례제도, 사직제도, 산천제사, 산릉보수칙, 기자묘의 신위제호, 종친대신의 상사의주 제정, 역대 국조제사제도 문제 등을 광범위하게 마련하였다. 불교정책에 있어서는 강력한 억불정책을 추진하여 태종의 회암사 행차를 반대하였고, 세종 말기에 세종이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였으며, 승도 600명을 동원하여 풍저창과 광흥창을 건립케 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적 출판에도 힘써 노걸대, 박통사, 효경 등을 간행케 하고 문학적인 면에서도 시와 가사 등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청빈과 과 자상한 인품, 그리고 인재양성 등에 관련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그가 얼마나 청빈한 생활을 했는가는 다음의 일화를 통해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하루는 태종이 황희의 집에 들렸는데 마당에 멍석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 멍석은 낡아서 많이 헤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태종이 "이 자리는 뽑아서 가려운 데를 긁는 게 좋겠다."고 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태종대와 세종대에 걸쳐 국가 발전과 민생의 안정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고, 청빈한 생활과 어진 성품으로 조선왕조를 통하여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것이다.

1452년(문종 2)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남원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파주의 반구정과 문경의 숙정사에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장수의 창계서원, 남원의 풍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이다.


관련문화유적

◎ 황희선생 영당지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명상(名相)이며 청백리(淸白吏)의 대표적인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호를 따라 방촌영당(尨村影堂)이라고 한다.

◎ 황희 선생 묘
조선초기(朝鮮初期)의 명재상(名宰相)이며 청백리의 표상인 방촌 황희(厖村 黃喜1363~1452) 선생의 묘이다. 선생의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村) 시호는 익성(成)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 반구정
반구정(伴鷗亭)은 고려말기와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명상(名相)인 방촌 황희(黃喜13631452)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던 곳이다.

문숙공 윤관(尹瓘)

1040(정종 6) ~ 1111(예종 6)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목재, 본관은 파평.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 출생과 관련된 비화로 아버지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날으는 꿈을 꾼 후에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낳았다고 한다. 일찍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고 한다.

일곱 살 되던 해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등과하여 습유. 보궐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로서 출추사가 되어 광주,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그뒤 좌사낭중으로 재직중이던 1095년 10월 숙종이 즉위하자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이어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로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고 이듬해 자치통감을 기증받고 돌아왔다. 이어 우간의 대부 한림시강학사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 대부와 친척이었으므로 사간인 어사대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의 상소에 따라 해임되었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자신의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어느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 하였다.

이같이 기세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과 이주 규모는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검진에 이주민 532가구 등이다. 이 6성 이외에 이듬해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가한촌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부하 척준경 등의 도움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자신의 일사분란한 지휘 아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군사들의 일심단결로 적을 패주시켰다.

3월 30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부하들과 함께 포로 346명, 말 96필,소 300두 등의 전리품을 앞세운 채 개경으로 개선하여 "문하시중"으로 봉해졌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 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눈을 감았다.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후대에 일가를 이루었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받고 있다.


관련문화유적

◎윤관장군묘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연산군 10) ~ 1551(명종 6)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본관은 平山.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본관은 平山, 아버지는 命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李氏)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13세 되던 해인 1516년(중종 11) 아버지가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 명화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 당시 참화를 당하지않았다.

외할아버지 사온은 사임당의 어머니를 아들 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친정에 살도록 했기 때문에 사임당도 외가에 살면서 어머니로부터 여자로서의 범절과 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겸비해 나갈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이씨인 원수와 결혼하였다. 자신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었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친정에서 생활하였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때때로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으며, 이런 와중에 셋째 아들인 이이를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같은 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후 사임당이 조선조를 대표하는 여인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사임당이라는 당호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당호는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당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생전에 보여준 온아한 성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배우고 본뜬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후 이이와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서, 그리고 아내의 역할을 생활 속에서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였던것에서 잘드러난다.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든가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였다.

즉 생전에 보여준 온아한 성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배우고 본뜬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후 이이와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예술가로서, 그리고 아내의 역할을 생활 속에서 성숙시켜 나갔던 것이다.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였던것에서 잘드러난다.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든가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였다.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그림에 대해 명종 때 사람인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작품으로 산수도. 초충도 등이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 폭과 해서 한 폭이 전한다. 이에 대해 온유재집에 "초서에 뛰어나 등나무 꽃과도 같이 창고스럽고, 그 변화가 구름 같으며 필채가 그윽하다."고 평하였다.

여기서 그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엿볼 수 있다. 죽은지 300년이 넘게 지난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전하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그 글씨를 평한 발문에서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면서도 고상하고 정결함과 동시에 고요하여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해 마지않았다.

그 글씨는 '마제잠두', 즉 말발굽과 누에머리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로 평가받는다. 시 분야에서는 몇몇 작품만이 전해지고 그 내용은 주로 친정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담겨져 있다. 서울 시댁으로 향하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읊은 "사진" 등이 그것이었다. 이는 어머니의 세계가 자신의 예술 방면에서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 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집안 환경에 있었다.

하나는 현명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가까이서 받을 수 있었다는 점과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다른 남성들이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에서 아내의 자질을 인정해 주고 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남편을 만났다는 점이다. 자신의 재능이 주변의 따뜻한 인간애를 통해 발현할 수 있었음인지 받은 후의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가운데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셋째 아들 이였다. 훗날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에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효성이 지극한 성품을 소상히 밝혔다.

또한 아들 우와 큰딸 매창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또한 남편을 제대로 보필했던 일화로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들어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시당숙을 못마땅히 여겼던 차에 남편이 그와 가까이 지내자,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문하에서 나올 것을 권하였다.

남편 원수는 아내의 조언을 받아들인 덕에 1545년(인종 1) 이기와 윤원형이 결탁하여 일으킨 을사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을 때 이에 연루되지 않고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면모를 종합해 보았을 때, 사임당은 조선 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굴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해 간 여인이라 할 수 있다.


관련문화유적

◎ 신사임당묘
이곳은 율곡 이이(栗谷李珥)의 어머니이며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인 사임당신 (師任堂申)의 묘이며 남편 이원수(李元秀)와의 합장묘이다.

우계 성혼(成渾)

1535(중종 30)~ 1598(선조 3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파주 우계 (현 파평면 늘노리)에서 거주하였으며, 파주읍 향양리에 묘가 있다.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본관은 창녕.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寗)이며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庵). 우계(牛溪)이다. 현감 수침(守琛)의 아들로 서울 순화방(순화방:順和坊 지금의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 진사의 양장(場)초시에는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해 겨울에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게 되면서 평생지기가 되었으며, 1568(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8년(선조 1)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장원서장원)·적성현감(積城縣監)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하였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선조 5)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일찍이 이황을 사숙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設)에 회의를 품고 있었는데,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하면서 서신을 주고받았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아니하였고, 그해 12월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하였으나 병으로 사체(辭遞)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 지평 등을 제수하였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지평 • 예빈시판관• 장흥고주부· 장령·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선조 14) 정월에는 종묘령(종묘령)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해 2월에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하여 진달하였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해 3월에는 장령에서 내섬사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이어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을 하사하면서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 • 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하였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에서나 상소로 계속 퇴구(退歸)를 청하였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炭)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讓衛上護軍)에 승배(陞)되었다. 그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선조 15)에는 다시 집의(義) · 사옹원정(司墾院正) · 사재감정(司宰監正)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아니하니, 그 이듬해에 특지로 통정대부(通政)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이가 죽자 사귀(辭歸)를 청하였으나 허여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으며, 그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를 하였고,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툰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하였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死)하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지만, 사실은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선조 23)에는 양민(養民)· 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으며, 1591년에 율곡집(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臣)으로서 부난(赴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다가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하면서 불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편의시무 9조(便宜時務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 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 영유(柔)?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유호(留扈)하였다. 1594년(선조 27)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 14조」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군대를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을 건의한 이정암(李廷?)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그길로 사직하여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선조 27) 2월에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하였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견(嚴譜)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는 『우계집』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1권 1책, 『위학지방(僞學之方)』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선조 35)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숙종 20)에 다시 승무(陞無)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蕓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書院)등이 있다.

휴암 백인걸

1497년(연산군 3) ~ 1579년(선조 12)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본관은 수원이며 월롱면 덕은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위(士禕) 호는 휴암(休菴)이다.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는 왕자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조선 중기의 학자 · 문신으로 본관은 수원이며 월롱면 덕은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위(禕) 호는 휴암(休菴)이다. 서울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버지는 왕자사부(王師傅) 익견(益堅)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金安國)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宋麟壽)·유희춘(柳希春)·이이(李珥)·성혼(成渾) 등 당대의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金湜)이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求道)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지내다가 돌아와 153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이때 예문관의 관리가 이조) 인사행정의 잘잘못을 기록하는 옛 관습을 복구하여 실행하였다. 예조좌랑을 거쳐 남평현감(南平縣監)이 되었는데 이때 근무를 성실히 하였으며, 특히 학당(學堂)을 세우고 학장(學長)을 두어 자제들의 교육에 힘쓴 공로로 품계가 높아졌다. 1541년에는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尹元衡)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등에 업고 권력을 오로지할 목적으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제거할 때, 헌납으로 있으면서 대비밀지(旨)의 부당함을 들어 극력 반대하다가 대비의 명으로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鄭順朋)·최보한(崔輔漢)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그 뒤 1547년(명종 2)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이기(李?) 등의 농권을 비난하는 양재(良才)의 벽서를 기화로 소윤(小尹) 세력이 대윤(大尹)의 잔존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되어 안변(邊)에 유배당하였다. 1551년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65년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교리로 등용되어 이듬해 사도시첨정(司?侍僉正)·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을 지냈다. 1567년 양주목사가 되었을 때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등의 치적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奇大升)의 건의로 특별히 뽑혀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공조참의 · 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으며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오래지 않아 철렴(撤簾)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 해 이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 초 선조가 그 아버지 덕흥군(德興君)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에는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하여 사림들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돌아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李俊慶)의 의견을 좇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로 인하여 선비들을 해하려 한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심을 사서 1571년(선조 4) 하주로 퇴거하였다.

그 뒤 우참찬으로 징소되었으나 치도(治道)를 논하는 소를 올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1579년(선조 12)에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함께 다시 동서 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西人)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았다. 그밖에도 국경의 상황을 논하여 군비를 닦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정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선조 초에는 많은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고 매우 연만하여 많은 시간을 파주에 퇴거하여 있었는데, 선조는 대사헌 · 우참찬 등의 관직을 내려 부르거나 식량을 내리기도 하고, 1569년의 경우와 같이 직접 편지를 보내 부르는 파격적인 대우를 베풀기도 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대한 탐구를 열심히 하였으며 이이. 성혼(成渾) 등과 더불어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기묘사화 뒤 명종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특히 1545년(인종 1) 을사사화 때에는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인조 때 충숙(忠肅)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과 용주서원(龍州書院), 남평(南平)의 봉산서원(蓬山書院)등이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휴암집』이 전한다.

구암 허준

1539년(중종 34) ~ 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原), 호는 구암(鳩巖)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조선 중기의 의인(醫人)으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과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지냈고, 아버지 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는 무과에 지원하지 않고 의관으로 내의원(內醫院)에 봉직하면서 내의·태의 어의로서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동의보감』을 편술하여 우리나라 의학의 실력을 중국 및 일본에까지 과시하였다. 1575년(선조 8) 2월에 어의로서 명나라의 안광익(光翼)과 함께 임금의 병에 입진(入)하여 많은 효과를 보게 하였으며, 1578년 9월에는 내의원첨정으로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新刊補註銅人?穴鍼灸圖經)』을 하사 받았다.

1581년에 고양생(高陽生)의 원저인 찬도맥결(贊圖?訣)을 교정하여 찬도방론맥결집성(贊圖方論?訣集成)』4권을 편성하여 맥법진단의 원리를 밝혔다. 1587년(선조 20) 10월에 어의로서 태의 양예수(楊禮壽)·이공기(李公祈)·남응명(南應命) 등과 함께 입진하여 상체(上體)가 평복함으로써 호피(虎皮)일열을 받았으며, 1590년 12월에 왕자의 두창이 쾌차하였으므로 당상(堂上)의 가자(加)를 받았다. 이때에 정원(院)사헌부, 사간원에서 허준의 의료에 관한 공로는 인정하나 의관으로서 당상가자를 받는 것은 지나친 상사라 하여 여러 차례 그 가자를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그것은 당연한 처사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허준은 선조의 피난지인 의주까지 호종하여 왕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모셔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 어의로서 내의원에 계속 출사하여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면서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 중 1596년(선조29)에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醫) 정작(?), 태의 양예수·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다음해에 다시 정유재란을 만나 의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편집의 일은 중단되었다.

그 뒤 선조는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의서 편집의 일을 맡기고 내장방서(內藏書) 500권을 내어 고증하게 하였는데, 허준은 어의로서 내의원에서 의무에 종사하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편집의 일에 전심하여 10여 년만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25권 25책이다. 「동의보감』은 그 당시의 의학지식을 거의 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내경(內景)·외형(外形)·잡병(雜病)·탕액(湯液)침구(鍼灸) 등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의학실력을 동양 여러 나라에 드러나게 한 동양의학의 보감으로서, 출판된 뒤 곧 일본과 중국에 전해져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출판되어 귀중한 한방임상의학서가 되었다.

허준은 『동의보감』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또는 알기 쉽게 한글로써 해석, 출판하였다. 1601년(선조 34) 세조 때에 편찬한 구급방(救急方)』을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으로 주해하였으며, 임원준(元濬)의 『창진집(瘡疹集)』 『두창집요(痘瘡集要)』로 을 그 이름을 바꾸어 언해, 간행하였으며, 1608년에는 노중례(盧重禮)의『태산요록(胎産要錄)」「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그리고 1612년(광해군 4)에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들을 구료하기 위하여 『신찬벽온방(新纂?溫方)』 1권과 『벽역신방(?疫神方』1권을 편집하여 내의원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다. 전자인『신찬벽온방』은 그전 해 12월에 함경도와 강원도 양도에서 온역(瘟疫)이 유행하여 남으로 내려와서 각 도에 전파되므로 이미 전해오던 『간이벽온방(簡易?瘟方)』을 다시 알기 쉽게 개편한 것이며, 후자인『벽역신방』은 그 해 12월에 각 지방에서 발진성(發疹性)의 열병인 당독역(唐毒疫)의 유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편집하였다.

이러한 의방서들의 편찬은「동의보감과 함께 우리나라 명의로서 관록을 더욱 자랑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허준은 내의·태의·어의로서 선조의 총애를 계속 받아왔다. 1601년에는 내의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서임하였고, 1604년(선조 37) 6월에는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3등에 복명하면서 숙마(馬)한 필을 하사받았으며, 1606년(선조 39) 정월에 양평군 정일품 보국숭록대부(陽君正一品 輔國崇祿大夫)를 가자(加資)받았다. 그런데 종래 우리나라의 계급으로서 의업은 중서급(中庶級)에 속하였는데, 허준이 대신들과 계급을 같이하는 동반(東班)의 부군(府君)과 보국(輔國)의 지위를 가지게 됨으로써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할 것을 계청하였다.

처음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고집하였으나 선조도 끈질긴 계속적인 계정에 할 수 없이 그 가자를 한때 보류하도록 하였다. 1607년 11월에 선조의 환후가 점차로 위독하게 되어 그 다음해 2월에 죽을 때까지 허준은 입진의 수의(首醫)로서 다른 어의들을 독려하여 어약을 논하는 모든 일을 전담하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아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로 파직되어 유배를 당했다가 광해군 원년(1609)에 다시 복직 되었다. 1613년 11월에 70세를 일기로 죽자, 호성(扈聖) 공로의 어의로서 선조가 일찍이 보류하였던 부원군과 보국의 가자를 추증하였다. 허준은 의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당상의 부군과 보국의 지위를 가졌다.

허준의 묘는 확인되지 않다가 1991년 9월 30일 『양천허씨족보』에 기록된 “진동면 하포리 광암동 선좌 쌍분" 이라는 내용을 바탕으로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조사한 결과 발견되었다. 묘역은 약 50평의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묘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 위에 허준선생의 생모의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文人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원래의 묘비는 두 쪽으로 파손되어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원비의 마모된 비문 가운데 『陽平□ □聖功 □浚』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선생의 묘인 것이 밝혀졌다.

구봉 송익필

1534년(중종 29) ~ 1599년(선조 32)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시련이 안처럼(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할머니 감정(甘丁)이 안돈후(安敦厚)의 천첩소생이었으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아버지 사련이 안처겸(安處謙)의 역모를 조작. 고발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당상관에 올라, 그의 형제들은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받았다. 재능이 비상하고 문장이 뛰어나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고, 명문자제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초시(初試)를 한번 본 외에는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여 명성이 높았다.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함께 성리학의 깊은 이치를 논변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김장생(金長生)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서인 세력의 막후실력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86년(선조 19) 동인들의 출동으로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켜, 안처겸의 역모가 조작임이 밝혀지고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 후손들이 안씨 집의 노비로 환속되자 그들은 성명을 갈고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로 정여립(鄭汝立). 이발(李)등 동인들이 제거되자 그의 형제들도 신분이 회복되었다. 그 때문에 기축옥사의 막후 조종인물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뒤에 또 조헌(趙憲)의 과격한 상소에 관련된 혐의로 이산해(李山海)의 미움을 받아 한필과 함께 희천으로 유배되었다.

1593년(선조 26)사면을 받아 풀려났으나, 일정한 거처없이 친구 ·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불우하게 살다 죽었다. 1586년(선조 19) 안씨의 송사 전까지는 파주의 심학산 아래에서 크게 문호를 벌여놓고 후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문하에서 김장생 • 김집(金集)· 서성(徐?)·정홍명(鄭弘溟)·강찬·김반(金槃)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는 시와 문장에 모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최립·이순신(李純臣)·윤탁연(尹卓然)·하응림(河應臨) 등과 함께 선조대의 8문장가로 불렸다. 시는 이백(李白)을 표준으로 하였고, 문장은 좌구명(左丘明)과 사마천(司馬)을 위주로 하였다. 자신의 학문과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여 스스로 고대하게 행세하였고, 아무리 고관 · 귀족이라도 한번 친구로 사귀면, '자(字)'로 부르고 관으로 부르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가 그의 미천한 신분과 함께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구봉집』이 전한다. 교하읍 삼남리에 유허비가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사재 김정국

1485년(선종16) ~ 1541년(중종36)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며 본관은 의성(義成)이며, 부사로 이조판서에서 증직된 익령(益齡)의 손자이며 예빈시참봉으로 우찬성에 증직된 연(璉)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부사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익령 손자이며 예빈시참봉으로 우찬성에 증직된 연()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예빈시정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조광조(趙光祖), 이장곤(李長坤) 등과 교류하였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와 진사시의 양시(兩試)에 오르고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부수찬, 승문원교검을 거쳐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510년 이조좌랑으로 선임되어 문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고 1512년 홍문관부교리로 옮겼다가 이듬해 교리로 승진하였다. 곧이어 사간원헌납에 임명되었고, 1514년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해 이조.공조.호조의 정랑을 거쳐 승문원교리로 전작되었다가 1515년 다시 이조정랑에 선임되었다. 1516년 의정부검상을 거쳐 이듬해 의정부사인으로 승진하고 사간원간, 군기시부정, 성균관사성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18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가 그 해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왕명을 출납하였다.

승지로 재임 중이던 그해 11월 현량과(賢良科) 설치문제에 대하여 조정의 논의가 분분할 때 현량과 설치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과거가 폐지되는 폐단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해 우승지로 승진하여 연산군을 위해 입후(立後)하기를 청하였고, 황해도관찰사로 재임 중인 1519년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경민편(警民編』을 편찬하는 등 지방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며, 조광조(祖)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장려운동에 호응하여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음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등 사림파 학자들의 무고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하였으나 사태가 급박하여 상소를 중지하였다. 후에 이러한 일들이 대간에 알려져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형인 안국(安國)과 함께 관직이 삭탈되었다. 그 후 고양군 중면 망동으로 내려가 스스로 “팔여거사”라 칭하였다. 고양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저술과 후진 교육에 전심하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관직에서 떠난 지 20년만인 1537년 관직이 복구되어 이듬해 용양위대호군을 거쳐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임 중 수십 조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으며, 시골 백성들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약방문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간행하였다. 1539년 병조참의와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경상도관찰사로 나가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 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1540년 예조 · 병조 ·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차례로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성리학과 역사, 의학 등에 밝았으며 문인으로는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저술한 정지운(鄭之雲) 등이 있다. 시와 문장에 뛰어났고, 형인 안국(國)이나 정광필(鄭弼)과 같이 조광조의 지치주의(治主義)를 지지하였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書院), 용강의 오산서원(鰲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저『촌가구급방 역대수수승총입도(歷代授受承銃立圖)』 『기묘훈적(己卯勳籍)』 『경민편』 등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진동면 하포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장포 김행

1532년(중종 27) ~ 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조부 사회(士熙)는 진산군수이고 아버지 국봉(國捧)은 일찍 작고하였다. 19세에 감시(監視)에 장원하였으며 초시에 시와 함께 뛰어난 필법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알성과에 올랐으나 천재(天災)로 해서 방을 내리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浦)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조부 사희(熙)는 진산군수이고 아버지 국봉(國)은 일찍 작고하였다. 19세에 감시(監試)에 장원하였으며 초시에 시와 함께 뛰어난 필법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알성과에 올랐으나 천재(天災)로 해서 방을 내리지 않았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소년시절 아버지를 여의어 백인걸(白仁傑)과 청송(松)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백인걸은 청렴하기로 세상에 알려진 분이고 청송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버지로 은둔생활을 하던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어려서 이 두 문하에서 배울 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청송이 그 아들 우계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의 뒷일은 반드시 김행과 논의하라”고 할 정도로 그를 애중히 여겼다. 김행은 이를 평생지켜 형제처럼 지냈다. 또 공부의 여가에 필적筆跡)까지 본받으니 스승을 흠모함이 이와 같았다. 교우 청강(聽江) 이제신(李濟)과는 그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그의 집이 소실되자 청강이 별당의 기와를 뜯어다가 쌓아 두었는데, 그는 그 기와로 지붕을 덮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와 이기를 권하면, "옛날 사람들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여도 짚으로 지붕을 이었는데 어찌 기와로 해야 하겠느냐." 하였다고 한다.

관직은 경관으로는 성균관전적, 형조· 호조 좌랑· 예조정랑· 한성부서윤· 내섬시· 사섬시· 사도시정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무장현감, 고양군수, 서천군수, 양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한 탓에 주로 외직에 머물러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생각이 합당한 것이라고 여기면 남을 개의하지 않았고, 강건하고 엄하며 꼿꼿해서 통속(通俗)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해학과 방관으로 스스로를 어둡게 가렸다. 익살스러운 말이나 웃음으로 보아서는 조심하는 것이 없는 듯 하지만 행적을 살펴보면 그 진실함에 부끄러울 바가 없었다.

역임한 고을마다 추호도 취한 것이 없으며, 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겨 살림이나 봉급을 모두 어머니께 드렸고, 비록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사유로 하는 것이 없었다. 누님 한 분이 일찍 홀로 되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가르치고 기르기를 자신의 아들처럼 하였다. 평생을 청렴근고로 가다듬되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여 남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집에 불이 나 이웃이 와서 도왔는데 집에 값나갈 만한 물건이 거의 없음을 보고 놀라워할 정도였다고 하여 죽은 뒤에도 염을 할 것이 없어 문객들이 옷을 벗어서 염을 하였다고 한다.

문장은 뛰어났지만 후세에 전하지 않으려고 지은 후 진한 먹으로 개칠해서 버렸다. 필법은 호탕하고 웅장하며 살아 움직이는 듯하여 당시의 명필들도 따르지 못했다. 무장군수로 있을 때에 조송설(趙松雪)의 「증도가(證道歌)」의 원본이 뭉개어진 것을 보고 그가 절반 이상을 손수 써서 인쇄 간행했는데, 원본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순변사 신립(砬)이 광주(州)에 왔다가 그와 여러 달 동안 활을 쏘는데 그 재주가 김행의 그것을 끝내 따르지 못했다. 임금이 신립에게 묻되 "수령 중에 장군 될만한 자가 누구냐?" 하니 답하되, “광주목사 김행이 활에 있어 당할 자 없고 지략이 뛰어났습니다.” 라고 천거하여 선조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행되지 전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문산읍 내포리에 묘와 장포 영당이 있다.

보진재 노사신

1427년(세종 9) ~ 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이며 자는 자반(子般), 호는 보진재 천은당당(天隱堂)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물재(物載)의 아들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며 자는 자반(般), 호는 보진재(?眞齋)? 천은당(天隱堂)이다.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물재 아들이다.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 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여 국가사명(國家詞命)을 관장하였으며, 1459년(세조 5)에는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이듬해는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1462년에 세조의 총애로 세자좌문학에서 5자급(資級)을 뛰어넘어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그 뒤 우부승지를 거쳐 1463년에는 도승지에 초배(超拜)됨으로써 국가의 기무(機務)를 관장하였다.

같은 해 홍문관직제학을 겸하여 세조가 주석(注釋)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要解)』를 증보하여 찬진(撰進)하고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가 되어 최항(崔恒)과 함께 『경국대전편찬』을 총괄하였다. 같은 해에 호조판서로 충청도 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여 지방행정의 부정을 낱낱이 조사하였고, 이듬해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또한, 1466년에 실시된 발영(拔英)응시하여 각각 1등과 2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얻고, 이듬해 달에는 등준(登俊) 양시에 건주위정벌(建州衛征伐)에 대한 군공2등(軍功二等)을 받았다. 1468년에는 남이(南怡),강순(康純) 등의 역모가 다스려진 후의 노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 의정부우참찬 · 좌참찬을 거쳐 우찬성에 올랐다. 우찬성에 재임 중 명나라의 사신 강호(浩)의 접반사(接伴使)로서 명사와의 예교(禮交)를 맺어 외교적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1470년(성종 1) 의정부좌찬성에 올라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성종 즉위를 보좌한 공으로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었다. 1476년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는데, 사서(史書)와 시문의 찬진과 성균관에서의 강의 등으로 성종의 문치)를 도와, 1482년에는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85년에는 영중추부사로서 평안도와 경기도의 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진휼사 겸 호조판서賑恤使兼戶曹判書)가 되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487년(성종 18)말에는 명나라 효종(孝宗)의 즉위를 맞아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영안도도체찰사(永安道都體察使)가 되어 국가의 사민정책(徙民政策)을 담당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좌의정, 1495년(연산군 1)에는 영의정에 올랐으나, 문과독권관(文科讀卷官)이었을 때 처족을 합격시켰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영의정을 사직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 때에는 윤필상(尹弼商) • 유자광(柳子光) 등이 주동이 되어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를 제거하는 논의를 할 때 세조의 총신이었다는 처지 때문에 미온적으로나마 동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 등이 옥사를 확대하려는 것을 극력 견제하여 사림파의 피해를 줄이는데 힘을 기울였다. 사옥이 진행되는 도중인 같은 해 9월에 병으로 죽었다. 유년시절에 홍응(洪應)과 함께 윤형(尹炯)에게 수학한 바 있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어 문과급제 직후에 이미 집현전학사가 되었다. 집현전학사 때에는 장서각에 나가 독서에 전념하여 “진박사(眞博士)”라 별칭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조 · 성종의 총애를 받아 문치를 도왔는데, 호조판서에 재직할 때는 「경국대전』의 편찬을 주관하고, 「경국대전』호전(戸典)의 편찬을 직접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성종 때에는 여러 사서(史書)의 편찬을 담당하였으며, 1476년(성종 7) 12월에는 서거정(徐居正)이파(李)와 함께 『삼국사절요』를 찬진하고, 1481년에는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의 수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서거정 • 성임(成任).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총재하였으며, 이를 위해 1476년부터 동국문사시문(東國文詩文)을 수집하였다. 한편, 1482년(성종 13)에는 이극돈(李克墩)과 함께 『통감강목(痛鑑綱目)』을 서거정 · 어세겸(漁世) 등과 같이 한글로 번역하는 등의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묘소는 파주읍 백석리에 있다.

쌍백당 이세화

1630년(인조)~1701년(숙종2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며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칠정(七井)이다.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이재(以載)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희재(熙載)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1년(효종2) 상상(上庠진사를 가리킴)에 올랐으며,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평(富平)이며 자는 군실(君), 호는 쌍백당(雙柏堂) / 칠정(七)이다. 병조정랑 계록(繼祿)의 증손으로, 이재(以載)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희재)의 양자로 들어갔다.

1651년(효종2) 상상((上庠) :진사를 가리킴)에 올랐으며, 165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언 / 장령 등을 거쳐 황해도/ 평안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89년(숙종15)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서호(西湖)의 향리로 돌아갔다. 그해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설을 듣고 반대소를 올렸다. 소에 판서 오두인(吳斗寅)과 그의 이름이 전면에 올라 있는지라, 숙종은 분노하여 밤중에 친국(親)하였다.

그는 국문에서 “국사로 인해 죽기를 원했는데 이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고, “다만, 신의 죽음이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우며, 신에게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다하더라도 옥리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면 될 것을 밤새도록 친국하니 옥체를 상할까 두렵다.”고 형간하였다. 다음날 정주로 유배가다 풀려나와 파산(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갑술환국 후 1694년(숙종20) 4월 대사간/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인현왕후복위도조감제조로 차정한다는 말을 듣고 곧 상경하였다. 그뒤 의금부사 겸 지경연사/세자빈객에 오르고,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그뒤 공조 / 형조 / 병조 / 예조 / 이조판서를 두루 역임하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저서로는 「쌍백당집」이 있다. 문산읍 선유리에 묘소가 있으며, 풍계(豊溪)의 충렬사(忠烈祠)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용재 성현

1439년(세종 21)~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鏞齋) 부휴자(浮休) 허백당(堂) 국오(菊塢)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念祖)이다.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등을 거쳐 사록(伺綠)에 올랐다.

조선 초기의 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鏞齋) · 부휴자(浮休子) · 허백당(虛白堂) · 국오(菊塢)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염조(祖)이다. 1462년(세조 8) 23세로 식년문과에,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敎) 등을 거쳐 사록(伺錄)에 올랐다. 1468년(예종 즉위년)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예문관수찬· 승문원교검을 역임하였다.

형 임(任)을 따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가는 길에 지은 기행시를 엮어 『관광록(觀光錄)』이라 하였다.

1474년(성종 5)에 지평을 거쳐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고, 이듬해 한명회(韓明會)를 따라 재차 북경에 다녀와 1476년(성종 7)에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성종 17)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간 · 대사성 · 동부승지·형조참판 ·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88년에 평안도관찰사로 있었는데, 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시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그들을 탄복하게 하였다.

같은 해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사은사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을 거쳐 1493년(성종 24)에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그러나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지자 한달 만에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이해에 유자광(柳子光) 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殿)」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또한 관상감 · 사역원 · 전의감(殿醫監) · 혜민서(惠民署)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그곳에 딸린 관원들을 종전대로 문무관의 대우를 받도록 하였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에 『용재총화(?齋叢話)』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저서로는 『허백당집』『악학궤범』『용재총화』『부휴자담론(浮休談論)』등이 대표적이다. 묘소는 문산읍 내포리에 있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지봉황보인

? ~ 1453년(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川)이며 자는 사겸(四) · ?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1414년(태종14)의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川)이며 자는 사겸(四) 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이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의 아들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寺直長).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고, 1414년(태종14)의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으며, 1422년(세종4)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하여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이듬해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이듬해 강무행행(行) 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살상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가 같은 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1432년 형조좌참판 · 병조우참판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恩使) 정효(孝)의 1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 평안• 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고 같은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 兼 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세종23)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하면서 종성 · 회령 • 온성 · 경원 · 경흥 등지에 소보(小)를 설치하여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여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데 공헌하였다. 1445년(세종27)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社)를 그뒤 1449년 의정부의 직에서 해임된 뒤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아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였으며, 같은 해에 좌의정의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문종의 고명을 받고 귀환하였으며, 이듬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 •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고, 이듬해에 영춘추관사(潁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같은 해에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 우찬성 이양(樓),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이 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고, 1746년(영조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그 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15) 장릉(莊陵) 충신(忠壇)에 배식(配食)되고, 1804년(순조4) 집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순조7)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詞)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법원읍 동문리에 있으며 월계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