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의 문화재

장릉

지정번호 :
사적 제203호
지정연월일 :
1970년 5월 26일
소재지 :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소유자 :
국가
조성시기 :
조선 후기 영조 7년(1731
규모 :
재료 :

문화재 설명

장릉長陵은 조선 16대 왕 인조仁祖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를 합장한 능*이다.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종이다.
스물여덟 살 때인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한 이듬해 이괄이 영변에서 난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공주로 피신했다가 난이 진압된 후 환도했다. 이후 인조는 27년간 재위하면서 모두 세 차례나 한양을 떠나 몽진했다. 특히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 갔던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표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당파 간의 싸움이 격화되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다가 1649년 55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했다.
인조의 비 인열왕후 한씨는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1610년 능양군과 혼인했고 인조 즉위와 더불어 왕비에 책봉되었다. 슬하에 효종, 소현세자, 인평대군, 용성대군 등 4형제를 두었으며 용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1635년 42세에 승하했다.
인조는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문산읍 운천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그 오른쪽 언덕에 자신의 묘 자리를 마련했었다. 그리고 인조가 승하하자 효종은 그곳에 장사지냈다. 그러다가 80여 년이 지난 1731년(영조 7) 석물 틈에 뱀들이 집을 짓는 등 극성을 부리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왕과 왕비를 합장했다.
장릉을 살펴보면, 봉분 뒤로 동·서·북쪽 방향의 곡장이 쳐져 있어 봉분을 아늑하게 보호해 주고 있으며 곡장과 봉분 사이에 있는 각각 네 마리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바깥을 보도록 배치되어 있다. 봉분 밑 부분은 병풍석으로 둘렀는데, 목단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장릉은 영조 때 옮기면서 합장릉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크기가 맞지 않게 된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魂遊石*, 장명등은 새로 바꿨고 나머지는 옛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병풍석과 장명등의 조각을 목단과 연화문으로 바꾸었다. 봉분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으며 봉분 앞에 혼유석 두 개를 놓아 합장묘임을 나타냈다. 그리고 혼유석 앞쪽으로 장명등, 양 옆으로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앞의 양쪽으로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한 쌍씩 서 있고 석마石馬들이 각 문인석·무인석 뒤에 살짝 비켜 서 있다.
능 아래에는 지붕 모양이 정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 이름 붙은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능역 입구에는 잡귀를 막고 신성한 공간임을 드러내기 위해 세운 홍살문이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