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일화] 사근절에 얽힌 유적의 일화

 조리면 오산리 안동권씨 종산아래 마치 병풍을 두른 듯 아늑한 구릉지가 평평하 게 펼쳐져 있는 곳에 자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고려말엽 건립하였다는 아담한 절 이 있었다는 절터이다. 이 골짜기를 절터골 또는 연못이 있어 연못제라 칭하기도 하였다 한다. 조선조 중엽 이 부락에 사대독자인 박첨지(朴僉知)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5대 독자가 결혼 후 삼년이 지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그 의 며느리는 여자로 태어나 남의 가문의 대를 끊게 될 뿐 아니라 칠거지악(七去之 惡)을 범하게 되었다며 자나깨나 근심에 젖어 있었다. 그리하여 득남을 하기 위하 여 절에서 백일기도를 하기로 결심하고 시부모님의 허락을 얻어 가사전폐하고 염 불에 전념하였으나 못내 마땅치 않은 시부모님께 불효만을 가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어느덧 100일을 맞게 되었다. 지성껏 불공을 올리던 부인이 그간의 누적 된 피로로 말미암아 부처님 앞에 불공을 드리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정숙한 몸가짐과 아름답게 빼어난 미모에 도취한 스님은 항시 연정을 느껴왔으나 불자의 몸으로 유부녀를 흠모하는 마음 자체도 커다란 죄악인지라 감정을 억제하고 오던 중 오늘따라 곤하게 잠에 빠진 부인의 모습을 보니 선녀와도 같고 측은해 보이기 도 하여 욕정에 복받친 중은 부인 곁으로 다가가서 겁탈하려고 하였다. 남편인 박 씨가 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부인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염려가 되어 횃불을 들 고 호신용으로 도끼를 가지고 절에 가서 보니 사찰문에 비춰진 한 쌍의 그림자가 자기 부인과 중이 다정하게 열애를 하는 장면같아 격분을 못 참고 문을 박차고 들 어가 도끼를 마구 휘두르니 혼비백산 뒷산으로 도망치는 중놈을 쫓아가 도끼로 내려치니 바위 위에 피를 흘리면서 즉사하였다.그 광경을 목격한 부인은 비록 남 편의 오해로 인한 참사일지라도 자기로 인하여 저질러진 비극으로 설상가상으로 불륜의 누명을 쓰게 되었으니 100일 치성도 물거품이 된 채 그 길로 절을 빠져나 와 사찰앞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체를 거둬보니 부인은 이미 임신 중이었다하나 남편의 순간적 오해에 의한 경거망동에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박씨 가문은 영원히 대가 끊어졌으며 박씨 일 가족도 이 부락을 떠나고 말았다 한다. 당시 중이 참살 당했다는 넓적한 바위에는 검붉은 얼룩진 핏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부인이 몸을 던진 연못 주위에는 비 나 눈이 오는 궂은 날에는 한 많은 여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린다 하여 밤늦게 는 다니지 못하였다 하며 사찰은 흉가로 변하여 방치된 채 풍우로 삭아 없어져 버 리니 그 후 이 마을을 사근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말미암아 방 문에 검은 천이나 발 또는 병풍을 가리고 잠자는 습관이 생기여 전래되고 있는데 이는 문에 비친 그림자로 인하여 오해를 일으켜 화를 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라 하 겠다. 최근에는 절터 주변에서 기와조각, 불기 등이 종종 출토되고 있으며 불상과 비석은 일정 때 일병들이 발굴해서 가져갔다 하며 절터와 연못에는 잡초만이 우거져 있다.   

질문[일화] 청백리 방촌선생 행적실기와 일화 (황희정승에 얽힌 야화)

 방촌선생이 출세하기 전에 한 점장이가 하는 말이 ‘앞으로 좌의정이 될 것이며 수명은 70세에 불과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영상이 되고 90세에 돌아가실 무렵 점장이가 찾아가서 하는 말이 제가 사람을 수없이 점쳐 왔으나 백에 하나도 틀림이 없었는데 황희 선생에게는 영험이 없으니 반드시 음덕(陰德)을 쌓은 까닭입니다.’ 하니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점장이가 한동안 반복해서 묻다가 간절히 조르며 ‘제발 숨기지 마소서’ 하니 그제야 설명하기를 ‘내가 음덕을 쌓은 일은 절대로 없네. 다만 소시에 서울 시장문을 걸어 나가는데 무슨 물건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보니 의외로 한짝의 금잔으로 기이하게 생긴 모양이 보통물건이 아니더군. 서울 문에다 아무날 아무시간에 물건을 잃은 사람은 아무의 집으로 오라는 내용의 방을 붙여 놓았더니 이윽고 한사람이 찾아와서 금잔을 잃었다고 말하더군. 바로 금잔을 내어 주었더니 그 사람이 절하고 감사해 하면서 이 금잔은 어공소(御供所)의 소유로 궁중에는 이 금잔 한쌍밖에 없어 다른 그릇과는 각별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수라를 올릴 때 한잔씩 바꿔가며 사용하는데 마침 내시를 통하여 몰래 가져다가 사위맞는 잔치에 잠시 사용하고 반납하러 오다가 길에서 분실한 것이라며 만약 다른 사람이 주웠던들 어찌 내어 줄 리가 있겠습니까? 애당초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여 죽어도 마땅한데 분실까지 하였으면 연좌되어 30여명이나 죽게 되었을 것인데 지금 이러한 은덕이 어찌 나 한사람 뿐이 겠습니까?’ 하고는 ‘이튿날 준마를 가져왔기에 역시 받지 않았을 뿐인데 이것이 어찌 음덕이 되겠는가?’ 점장이는 매우 감탄하였다.‘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영상에 이르고 수명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그 까닭입니다.’ 이어 금잔을 분실하였던 사람을 찾아갔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그 아들이 ‘나의 아버지는 생존에 날마다 첫 새벽만 되면 일어나 절하며 황희정승에게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고 수명은 90을 누리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가 죽기에 이르러서야 그쳤다.’고 지난 일을 이야기 하였다한다. 서기 1419년에 최윤덕이 개선할 때 임금이 이종무를 맞이하던 예를 따라 몸소 모화관에 나가 맞이하려 하자 황의 등이 말하기를 상왕께서 전에 낙천정에서 종무를 맞아 위로한 것은 우연히 낙천정에 거동하셨을 때 마침 종무가 당도했기 때문이고 오늘의 일은 나라를 수습한 공이 아니고 다만 조그만 도적을 토벌하였을 뿐인데 어찌 몸소 나가 맞이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은 윤덕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모든 장수에게도 차등을 가려 품계를 올려주고 상을 내리는 한편 근정전(勤政殿)에 거동하여 위안잔치를 베풀고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옷과 신을 하사 착용케하고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손수 잔을 들어 윤덕 등에게 권하고 세자를 명하여 술잔을 돌리도록 한 뒤에 윤덕에게는 그냥 앉아서 잔을 받으라고 이르고 군관을 명하여 서로 마주서서 춤을 추게하니 윤덕도 술이 얼큰해지자 일어나 춤을 추었다. 황정승은 집에 있을때는 성품이 너무 너그러운 편이어서 평소에 부인이 말하기를 이러한 분이 어떻게 재상의 중책을 맡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뒤 어느 날 입궐하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 관복을 갖추었다. 선생은 관복만 입으면 아무리 집에 있을 때도 반드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침 부인이 간단한 음식을 마련하여 앞에 다가오다가 위풍이 엄숙함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리둥절하였다. 거동을 본 황희정승은 웃으며 ‘이제야 재상임을 알았는가?’ 하였다. 언제나 천성이 검소하여 재상 지위에 있은지 수십년 동안에 집안이 쓸쓸하여 마치 가난한 선비와 같았으며 볏짚으로 엮은 자리(멍석)에 기거하면서 이 자리가 가려운데를 긁기에 매우 좋다고 하였다. 맏아들 호안공치신이 새집을 지은 뒤에 낙성연을 베풀어 백관을 초청하니 모두 모인 석양무렵이 되어 황희정승이 들어와 집의 구조를 돌아보다가 아무말도 없이 일어서서 나갔다. 이는 구조가 너무 사치스러움을 싫어한 것이다. 좌중은 모두 무색하게 앉았다가 헤어졌고 호안공은 황공하여 즉각 구조를 고쳤으니 가법의 엄격함이 이러하였다. 작은아들인 수신에게 정이 매우 깊었던 기생이 있어 늘 엄격하게 나무라면 예, 예하며 물러 나와서는 끝내 끊지 못하였다. 하루는 수신이 외출하였다가 들어오는 것을 본 황희정승은 관복을 갖추고 문밖까지 나가 맞이하였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너를 손님 대하는 예의로 대하는 바이라고 하였다. 수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청한 뒤 그 후부터는 그 기생과 일체 만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신은 몹시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그 기생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밤중이 되어 술이 약간 깨어 눈을 떠보니 촛불 앞에 한 여인이 가까이 앉아 있었다. 이는 바로 전날 친했던 기생이었다.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가 어찌 여기와 있느냐 하니 저의 집을 두고 어디로 가겠어요? 한다. 그제야 다시 살펴보니 과연 기생의 집이었다. 크게 노하여 하인을 나무라며 죽이려하자 하인이 변명하였다. 이곳을 지날 때 말이 이 집으로 찾아들기에 소인은 대인께서 고삐를 이 집으로 돌리신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는 수신이 평소 이 집에 왕래할 때 기생이 말을 매 우 잘 거두어 준 까닭에 말이 저절로 이 집으로 머리를 돌린 것이며 사람의 지시가 아닌 것 같았다. 그제야 깨닫고 검을 뽑아 말머리를 치도록 하였다. 황희정승은 일찌기 태학관에 나가 여러 선비를 모아 놓고 문예를 시험하였는데 김광국(金光國)의 나이가 가장 적었다. 그의 문장을 보고는 큰 그릇이 될 것을 짐작하고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그때 아들 전참공에게 출가하지 않은 딸이 있어 돌아와 전참공의 아내를 보고 내가 오늘 훌륭한 선비 하나를 보았으니 바로 혼구를 마련하여 사위로 맞도록하라 하니 그 사람됨을 본 뒤에 거행하겠다고 하자 즉시 김공을 초청하였다. 김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세가 빈한데다 오랫동안 학관 (學館)에 기숙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남루한 의복에 미투리를 신었고 외모도 별로 특이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달갑게 여기지 않자 그 사람은 반드시 대성할 것이니 놓치지 말라고 이르고 날짜를 가려 손서로 맞이한 뒤에 매우 애지중지하여 항상 상국랑(相國郞)이라 불렀는데 과연 좌의정이 되었다. 황희정승이 참찬(參贊)으로 있을 때 황해도에서 10여세 된 아이종을 데려가다 자제들의 글방 심부름을 맡겼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밖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조금도 틀림없이 줄줄 외웠다. 기이하게 여겨 즉시 양인(良人)으로 만들어 주려고 먼데로 떠나 보내면서 당부하였다. 삼가 이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딴 데로 옮겨 살면서 학문이 있는 사람을 찾아 몸을 의지하고 부지런히 공부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니, 다시는 이곳 에 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는데 그후 10여년이 지난 뒤 정시(庭時)에서 5, 6명이 뽑힌 가운데 황해도에서도 한 사람이 참방(參榜)이 되었다. 그때 황정승은 영상으로 있었다. 급제한 선비들이 모두 뵙기를 청해 오는데, 맨 뒤에 한 선비가 말에서 내리더니 문에 들어서자마자 꿇어 엎드리는 것이었다. 황희정승이 보고 그대는 어찌하여 그처럼 공손하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잡아 자리에 앉히니 그 선비가 어렸을 적의 이름을 대었다. 그러자 더 이상의 말을 못하게 하고 후의로 대접한 뒤에 가만히 일렀다. 너의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면 혹 벼슬길에 구애를 받아 좋은 명망을 기대하기 어려울까 염려되니 십분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 선비는 황공하고 감격해 하며 물러간 뒤에 큰 벼슬에 올라 지위와 명망이 대단하였으며 그의 성은 오(吳)라 하였다. 그후 재상으로 있은지 20여년 동안에 대사만을 힘써 왔으므로 매일 아침에 간단히 문안을 드렸고 육조판서들도 다만 공사에만 의견을 거론케 하였고 문전에는 타고온 말이 없었다. 혼자 우뚝 앉았다가 공사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고관이라도 반드시 의장에 옮겨 앉아 만나 보았다. 하루는 이조판서가 가정사를 아뢰고 나서 꿇어 엎드려 간청하기를 아무 날 혼사가 있으 니 대감께서 왕림해 주시면 감격하고 영광스럽기 이를 때 없겠습니다. 하니 아무 대꾸도 없었는데 그가 물러간 뒤에 대관(臺官)이 감히 영상을 초청하였다는 죄를 노하여 마침내 중벌에 처하게 되었다. 황희선생도 처음에는 두문동에 들어가 일생을 마칠 뜻을 두었다. 태조 원년(1392)에 경학이 밝고 수행이 단정한 선비를 채택할 때 그를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두문동 제현들이 구부(懼夫)가 나가지 않으면 창생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권하고 도 소명이 계속되자 할 수 없이 하산하게 되었다. 정건천이 그의 부채에 「그대는 청운에 올라 떠나고 나는 청산을 향해 돌아서네 청운과 청산이 이로부터 멀어지니 눈물이 벽라의(碧蘿衣)에 젖는구려.」라는 당인(唐人)의 시를 적어 주며 전송하였다. 〈정건천문집〉 개성부 송악산에 용암 폭포가 있다. 날아서 내리지르는 모습이 마치 무지개와 같고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끊임이 없었는데, 익성공이 잉태되던 날에는 냇물이 뚝 끊겨 열 달 동안 한 모금의 물도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공이 태어난 뒤에는 물이 다시 이전처럼 흘러내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이 산천의 정기를 품수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이는 옛날 미산의 풀이 말라 죽던 예와 비슷한 일이다. 〈박씨소기 박세상〉 황익성공 희는 고려 말기에 적성의 훈도(訓導)로 있었다. 하루는 적성에서 송경으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이 노랗고 까만 소 두 마리로 밭을 갈다가 막 쟁기를 떼어 놓고 나무 밑에서 쉬는 것을 보았다. 공도 그 옆에 말을 쉬이며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노인의 두 마리 소가 다 살찌고 건장한데, 밭갈이할때 힘에는 우열이 없소?」하자 노인이 입을 공의 구에 대고 속삭였다. ‘저 빛깔의 것은 쓸만하고 이 빛깔의 것은 뒤지오.’하였다. 이에 황희정승은 ‘노인은 소가 무엇이 그리 꺼려서 이처럼 속삭이는 거요?’하자 ‘답답하오. 손님이 아직 연소하여 물정을 모르는구려. 짐승이 비록 사람과 말은 통하지 못하지만 말의 좋고 궂은 것은 환히 짐작하므로, 만약 자기가 못나서 남에게 뒤진 다는 말을 듣는다면 불만스레 여기는 마음이 어찌 사람과 다를 바가 있겠소?’하였다.공은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였다. 공의 한 평생 겸손하고 인후한 덕량은 그 노인의 한 마디 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려 말기에 어진이로서 농사에 숨은 이가 많은데 그 노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이다. 황익성공이 수상으로 막 조정에 들어가려고 할 때 한 노인이 남루한 의복에 지팡이를 끌고 앞에 나타나 익성의 자를 부르며 말하였다. ‘내가 지금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어디를 가려는가?’ 공이 수레를 멈추고 대답하였다. ‘마침 공사가 있네. 바로 돌아올테니 내집으로 가 밥을 달라 하여 들면서 기다리게.’ 노인은 곧장 공의 집에 이르러 공의 자제에게 말하였다. ‘너의 부친이 나더러 집에 와서 기다리라고 하였으니 어서 밥이나 가져오너라.’ 노인의 요구대로 밥을 지어 대접하였는데 조금 뒤에 공이 돌아와 노인과 한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방안에 드러누워 너니, 나니 하면서 말을 주고 받았는데 이야기한 바가 무엇인가는 아무리 집안 사람이라도 알 수 없었다. 노인은 떠나는 날 공에게 요구하였다. ‘요즘 식량과 찬거리가 떨어졌네.자네가 좀 도와주지 않겠는가?’ 공이 몇 가지 찬거리와 식량을 약간씩 자루에 넣어 청지기에게 맡기면서 노인이 가는 데까지 메어다 주라고 일렀다. 노인은 경양진을 지나 관악산 아래 이르러서는 줄곧 산으로 올라 서서 중턱에 멈추더니 청지기에게 물었다.‘너는 조반을 들었느냐?’청지기가 들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갈 길이 아직도 멀었으니 식사를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고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을 가리키며 ‘저 집 주인은 나와 절친한 사람이다. 네가 찾아가서 내말을 이르고 밥을 청하면 반드시 후하게 대접할 것이다. 나는 잠시 이 나무 아래 앉아서 너를 기다리겠다. ’ 청지기가 그 집으로 가서 노인의 말을 소개하자 주인이 그 늙은이가 대체 누구이며, 네가 무엇하는 자이기에 밥을 달라고 하느냐고 꾸짖으며 몽둥이를 휘둘러 내쫓았다. 청지기가 멍해진 표정으로 노인이 있던 곳에 돌아와 보니 노인과 짐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송과 잡기〉 공이 급제하기 전에 처가에서 덧붙어 지냈는데 말과 웃음이 드물고 늘 눈을 감은채 앉아 있기만 하므로 사람들이 바보로 취급하였다. 마침 처가에 불량한 하인 하나가 있었다. 주인이 제거하지 못하여 매우 고심해 오던 어느 날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대가 그놈의 버릇을 고쳐 줄 수 있겠는가? 공은 그러하겠다고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하루는 그 하인이 술에 만취하여 주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공이 듣고 다른 하인에게 점잖게 일렀다. 저 놈을 잡아 오너라. 하인이 나갔다가 그냥 돌아와 말하였다. 그놈이 만취되어 쓰러져 있습니다. 쓰러져 있으면 끌어 오너라. 하인이 다시 나간지 한참 뒤에 상투를 잡아 끌어왔다. 작도를 가져 오너라. 하인이 웃으며 작도를 가져다 앞에 놓았다. 저 놈의 목을 끌어다 도판(刀板)위에 올려놓아라. 하인이 혼쭐을 내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웃으면서 시키는 대로 하자 공이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어서 작도를 밟으라고 호령하는데 그 눈이 전광과 같았다. 하인이 깜짝 놀라 작도를 밟아버리자, 목이 잘려지고 말았다. 그 후 부터는 사람들이 모두 공을 두렵게 보았다. 각처 고을에 있는 창기를 폐지하자는 주청이 있자, 임금이 회의에 부쳤다. 다른 대신들은 다 폐지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아직 공만의 의견이 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공에게도 이의가 없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공의 제의는 의외로 달랐다. 남녀란 사람의 큰 욕정에 관계되어 있는 것이므로 금제 할 수 없으며 각처 고을에 있는 창기는 관가의 소유로 누구나 이용해도 괜찮은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폐지한다면 연소한 조관으로 외방에 나간 자가 여염집 부녀를 불의로 탈취하여 그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신의 의견에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마침내 공의 제의에 따랐다. 〈동야야집〉 황공이 입궐한 사이에 부인 양씨가 좋은 배 몇 개를 얻어 공에게 드리기 위하여 시렁 위에 얹어 두고 잠시 친가에 갔었다. 공이 퇴청하여 내실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시렁 위에서 쥐가 자꾸 들락날락하면서 그 배를 훔쳐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배가 둥글고 미끄럽고 또 커서 입으로 물어가지 못하더니 이윽고 다른 한 마리가 나타나 한 마리는 배를 안은 채 벌렁 드러눕고 한 마리는 배를 안고 있는 쥐를 물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이런 방법으로 배를 몽땅 훔쳐가는 것이었다. 얼마 뒤에 부인이 들어와 배를 찾아 보았으나 한 개도 없었다. 공에게 물었으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부인이 노하여 집을 보았던 어린 비녀를 추궁하였는데 그 말이 궁색하였다. 드디어 회초리로 때리자 겨우 두어대를 맞고는 제가 훔쳐 먹었다고 자백하였다. 공은 죄없이 억지로 자백하는 것을 보고 한동안 내심 탄식하였다. 며칠 후에 조정에서 그 일을 이야기하고 이어 여쭈었다. 지금 국내에는 반드시 애매한 형을 받은 자가 많을 것입니다. 임금이 즉시 행회(行會)에 명하여 오래 동안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하자, 경향 각지에 있는 옥들이 일시에 텅 비게 되었다고 한다. 건국초기에는 한 차례의 형(刑)에 매 백대로 되었는데, 공이 이를 계기로 너무 중하다고 건의하여 삼십대로 감하였다고 한다. 〈창계록에 임영〉 황익성공은 평소 집에서는 담담하여, 아무리 아손(兒孫)과 어린 종들이 몰려들어 울고 장난을 쳐도 일체 금제하지 않고 혹 수염을 잡아당기거나 뺨까지 때려도 내버려 두었다. 하루는 속관(屬官)을 데리고 일을 의논하다가 붓에 먹을 찍어 막 문서를 작성 하려는데, 한 어린 종이 종이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은 노한 기색이 없고 다만 손으로 씻어버릴 뿐이었다.(명신록에 보임) 〈청야집 이해조〉 공이 재상으로 있을 때 김종서가 공조판서가 되었다. 하루는 공소에 모였는데, 종서가 공조(工曹)를 시켜 약간의 주과(酒果)를 준비해 올리게 하였다. 공이 노한 표정으로 「국가에서 예빈사를 정부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위함이다. 만약 출출하면 의당 예빈시를 시켜 준비해 와야 될 터인데 어찌 사사로이 공조에서 준비하였는가?」 고 말하고, 종서를 앞으로 불러 매섭게 질책하였다. 금상 극성(金相克成)이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이야기하고 나서, 「대신이란 마땅히 그러해야만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로 아뢰었다. (명신록과 동각잡기) 일화1 황희는 집에 있을때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항상 곧은 자세로 앉아 책을 읽었다. 하루는 웬일로 바깥이 떠들썩하였다. 두 계집종이 서로 잘했느니 못했느니 바락바락 고함치며 다투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 종의 하나가 황희 앞으로 들어와 땅을 치며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집안사람들에게도 상대가 아이든, 어른이든, 가족이든, 종이든, 가리지 않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황정승이었다. 그런 까닭에 계집종은 황희앞에서, 감히 땅을 치며 하소연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분이년이 쇤네한테 마구 욕을 하고 있어요. 제가 잘못해 놓고서는 되려 쇤네를 욕하옵니다.” 분이를 꾸짖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이란 계집종도 쪼르르 뛰어 들어왔다. “아니옵니다. 대감마님 쇤네가 잘못이 아니옵니다.” 이에 황희는 부드러운 웃음을 짓더니 두 계집종을 번갈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무슨 대답이 그러냐는 듯이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빠진듯 황희를 쳐다보았다. 갓 쓰고 점잖게 앉아있던 황희의 조카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무슨 대답이 그리 흐리멍텅하게 하십니까? 누가 한 짓은 어디가 잘못이니 어떻게 하라든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따지고 가려주셔야지요.”하니 황희는 잠시동안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도 또한 옳은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뚜렷한 말씀이 계시리라고 생각하던 방안 사람들은 또 한번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시면 싸움의 잘잘못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도록 잘라 말씀하셔야지요.”조카가 다시 말하였다. “아니다.” 간단한 대답할뿐 황희는 입을 다물고 책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골라내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제가 한 일부터 되새겨 보아야 한다. 자기의 잘못을 먼저 깨닫고 보면 옳거니 그르거니 싸움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황희는 그렇게 말할 노릇이었으나 짐짓 입을 다물어 버린것이었다. 일화 2 명나라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새 한쌍을 보내왔다. 그리고 이 새를 키워서 보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을 주어도 먹지를 않는 것이었다. 이 아니 걱정거리가 아니겠는가? 조정 대신이 며칠씩 모여 상의했으나 별 묘안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이때 한 신하가 품 하기를 황희 황정승께서 선견지명이 있는 분이니 생전에 무슨 말을 남긴 것이 없나 알아봄이 어떠하냐고 제의를 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내서 알아 보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하는 말은 이러하였다. (남아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돌아가시려 합니까? 하니 황정승 말씀하시기를 공작도 거미줄을 먹고 사는데 산 사람입에 설마하니 거미줄이야 치겠소)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거미줄을 걷어다 먹였더니 사경에 이르렀던 새는 그 거미줄을 주는대로 먹고 잘 자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명나라 사신이 와서 죽을 줄만 알았던 공작이 보다 더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서는 본국에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니 명나라 황제는 감탄하며 ‘황희가 세상을 떠나 조선에는 명인이 없는 줄 알았더니 아직도 그만한 인물이 또 있구나!’ 하며 다시는 소국이라고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황정승이 평소에 청빈한 생활로 이어오다가 가족들에게 유언한 것이 국가명예까지 공헌이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일화] 명당자리 거지무덤(乞人墳)의 일화

 우리나라는 조선조 말엽 1900년부터 일제를 거쳐 8·15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는 1970년까지 70여년 동안 전쟁으로 인한 난시와 매년 홍수와 흉년이 거듭되면서 큰 혼란속에 보리밥과 조밥, 호밀밥, 시레기죽과 피삼죽, 수수풀떼기, 개떡, 감 자와 옥수수 등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집을 잃은 수많은 거 지(乞人)가 속출 남사당패와 각설이, 돌중들이 각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상가집이 나, 연자방아간, 움집 등 노숙하면서 수십명씩 몰려 다니며 유랑걸식을 하게 되 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끼리 서로 모인 거지이지만 어른 아이 할것 없이 친형제 와 자식같이 예의를 잘 지키며 서로 사랑하고 우정이 두터워 왕초거지가 명령을 하면 아무말 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아름다운 미풍이 감도는 가운데 누구하나 신 병으로 신음을 하면 서로 정성껏 치료와 위안을 할뿐 하니라 사망했을 때에는 인 근에 다른 거지들과 합세하여 성시성의를 다하여 장례를 치뤄 주었다. 이러한 가 운데 어린 거지들은 아침 저녁이 되면 깡통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문전에서 밥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전부 모여 둘러앉아 식사를 했고 청장년 거지들은 지팡이를 집거나 손을 들너 메고 병신행세를 하며 시장을 돌아다니며 「각설이 타령」을 하면서 한푼 두푼 구걸을 하여 모은 돈을 모두 왕초거지에게 바치면 일괄공개하 고 예금하여 저축을 하게 된다. 또한 견듸자루를 메고 각 부락 큰집을 골라 다니며 슬픈 어조로 각설이타령을 하면서 잡곡을 구걸하여 장에 팔아 돈을 만들어 예치 하는 한편 나이가 지긋한 5,60대 거지들은 옹기장수나 소금장수를 하여 돈을 벌어 왕초거지에게 바친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 고장 금촌읍 아동리(안산동) 부락에 연자방앗간이 있어 수십명의 거지들이 정착하여 살았는데 겨울에는 볏짚을 얻어 다가 이엉을 엮어 둘러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잠을 자는 한편 화로불을 피어 몸을 녹이며 포근한 정을 나누었고 낮에는 실내 빈대와 벼룩을 잡고 이불이나 옷과 머 리에 득실대는 이를 잡았으며 여름과 가을철에는 모기로 인하여 잠을 자지 못하 여 바깥 뜰에 멍석을 피고 모닥불을 피워 잠을 자는 괴로운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어수선한 세월 속에서도 거지들은 밤이 되면 이러한 이야기, 저러한 이야기로 웃 음바다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곳에 있던 조선행이라는 거지는 이곳에서 어린 자식 둘을 데리고 소금장사를 하였는데 1971년 4월 봄날 소금을 지게에 걸머지고 광탄면 발랑리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소금을 팔고 돌아가는 도중 백경수가 흐르는 길목 기슭에 지게를 버티어 놓고 주저앉아 쉬다가 피곤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잠이 든채 세상을 떴다.이 소식을 들은 모든 거지 수 십명이 일제히 달려와 죽은 그 자리에 장례를 지냈다. 조선행의 어린 자식은 성장하여 인천에서 소금장수를 하여 돈을 많이 벌어 결혼을 하고 아들 형제를 두 어 큰아들 조장원은 의과대학을 졸업 인천에서 병원을 개설 운영하고 작은 아들 조창원은 미국으로 건너가 장사를 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자손들은 아버지 거지 무덤을 생각하고 찾아와 주위 임야 7,000여평을 구입 산소를 잘 복원하고 수 호 관리하게 되었으며 명당자리 와복형국(蛙伏形局) 거지무덤으로 널리 알려지는 한편 받들고 있어 매년 봄 가을로 찾아와 정성껏 금초와 제사를 들여 효자들이라 고 칭송이 자자하다는 유래가 내려오고 있다.   

질문[일화] 매죽헌(梅竹軒) 성삼문선생의 일화

 성삼문(成三問) 선생은 본군관하 법원읍 금곡리 파평산 남맥 관모봉하에서 태종 18년(1418)에 출생 할아버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성달생(成達生)에게 글을 배웠으며 계묵(溪墨) 산골짜기 현불당제터에서 자습을 하면서 글씨를 얼마나 썼던지 이 골짜기 개울에 먹물이 늘 많이 내려와 묵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선생의 아버지는 도총관(都總管)을 지낸 승(勝)이다. 선생은 세종 20년(1438) 식년문과 생원시(生員試)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장원급제 하였으며 144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학사 수찬을 거쳤으나 신숙주와 예기대언독(禮記大諺讀)을 편찬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항상 세종대왕을 가까이 모셔 총애를 받았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정 등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강희안 등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위해 당시 선생은 요동(療東)에 유배되어 있는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 질의와 수십차례 명나라를 오고 가면서 음운(音韻)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한 끝에 세종 28년(1446) 9월 29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반포(頒布)한 문장가이며 대학자이시다. 선생의 할아버지 성달생(成達生)이 세종 26년(1444) 세상을 뜨시니 금곡리에 묘소를 쓴 후 아버지 승(勝)이 세종 22년(1440) 경상병마 절도사를 있을 때 파주에서 홍주(洪州)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종 1년(1453)에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집현전 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시호(諡號)가 내리자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었으나 선생은 수치로 여겨 혼자서만 열지 않았다 한다. 단종 3년(1455) 예방승지(禮房承旨)로 있을 때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을 했으며 이듬해 좌부승지로 있을 때 아버지 승(勝)은 박팽년(朴彭年)등과 같이 단종 복위운동을 모의 4월 명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兪應孚)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 한명회, 권남, 정인지(鄭麟趾)등 일파를 없애기로 협의를 했으나 당일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하였던 김질이 성사가 안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밀고를 하여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親鞠)을 받고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받았으며 아버지 승(勝)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한 후 선생과 그의 아우 삼빈, 삼고(三顧), 삼성(三省)을 비롯한 맹첨(孟첨 ), 맹년(孟年), 맹종(孟終)과 갓난아기 아들 4형제 가족등 10여명이 세조 2년(1456) 살해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온데간데 없고 선생의 넋을 추모하는 홍주의 노은동에 록운서원(錄雲書院), 육신묘(六臣墓), 영월에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충열사(鶴山忠烈祠), 창영의 물계세덕사(物溪世德祠),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동학사(東鶴祠)등에 봉안되었으며 영조 34년(1758)에 이조판사로 증직 충문으로 시호(諡號)되었다. 선생은 억울하게 사라지니 후손이 절손되어 법원읍 금곡리 뒤산 관모봉(冠帽峯)아래 그의 고향에 초라한 조부모(成達生) 산소와 숙부, 종제의 설단(設壇) 그리고 살던 집터(성부터)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   

질문[일화] 현모양처(賢母良妻) 유씨부인의 일화

 유씨부인(柳氏夫人)께서는 강계부사 유당(柳堂)의 6남매중 첫째딸로 관내 파평면 두포리(장계)에서 유양유씨 가문에서 태어나 동생 유몽인(柳夢寅)이 글을 배울 때 어깨너머로 경사(經史)와 시문을 배웠으며 총명하고 영특하여 경사에 통달하였고 시문(詩文)에 능한 규수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입동아춘색(入洞芽春色)하고 행교답수성(行橋踏水聲) 〈마을에는 춘색이 깃들었고 다리를 건너가매 물소리 요란하도다〉 이러한 명시가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한다. 그후 명문가인 적성면 학곡리에 사는 남양홍씨 홍천민(洪天民)에게 출가하여 현모양처로 시아버지 이조판서 홍춘경(洪春卿)과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어 사랑을 받았다. 남편되는 홍천민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서 중종 38년(1543) 사마시와 명종 8년(1553)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 수찬을 거쳐 사가독서(賜假讀書)한 후 정언 이조좌랑에 있었다. 그 당시 시동생이 말하기를 아주머니는 유생(儒生)들의 선생이십니다 하며 감탄하고 아주머니에게 경사를 다시 배우겠다 하였으니 얼마나 지식이 해박(該博)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경사를 막론하고 시에 대한 조예(造詣)와 감식(鑑識)에 있어서도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다 하겠다. 그 후 남편 홍천민이 인조 8년(1630)에 유씨부인 수연 잔치를 베풀었을 때 장유, 김기종, 안응정을 비롯하여 당상관급 18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형조판서 장유는 그의 아들 좌참찬 홍서봉을 자기 옆에 앉히니 대감은 이름난 명문가에 태어나 문학과 시문에 뛰어난 규중 어머니를 모시고 계시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하며 대감의 비상한 재주를 개발하여 주신 현모가 계시어 호당의 한사람이 되신 것을 알고 계십니까 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이 오늘 온 것을 할아버지(洪春柳) 아버지(洪天民)와 더불어 삼대호당(三代湖堂)으로 등장되어 이름이 더욱 빛나게 되었고 모당의 덕행을 예찬(禮讚)하러 온것이라 하며 유씨부인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장유의 말을 들으니 올바른 말씀이라며 내가, 오늘날 사람이 된 것은 첫째 군은(君恩)이 계셨음이요 둘째 어머님의 교훈(敎訓)이 올바르심에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으나 어머님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걱정이라고 탄식을 하였다. 이날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는 유씨부인의 덕행에 감동하고 설금자(雪錦子) 세근(三斤)을 하사하시어 위로하여 주시었다. 그 후 홍서봉(洪瑞鳳)은 인조 17년(1639) 공신부원군(功臣府院君)에 진급하고 이듬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문장(文章)과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글씨에 뛰어났다. 위대한 유씨부인은 88세에 세상을 떠나시었으며 홍서봉은 홍문에 꽃을 피우고 인조 23년(1645)에 죽으니 시조(時調)와 학곡집(鶴谷集)이 남아있다.   

질문[일화] 공수천(供水泉)에 얽힌 유적의 일화

 월롱면 영태리에 겨우 세 가구가 사는 동리가 있었으니 그 동명을 공수물이라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때 이 서(李曙) 등 동지들이 모여서 장단으로부터 서울로 쳐 들어갈 때 낙하도(洛河渡)를 건너 옥돌 내를 지나 이 곳 공수물에 이르러 우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는데 이 우물을 공수물(供水泉)이라 하였고 또 그 마을을 공수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공수물은 그후 폐동이 되어 없어지고 그 우물도 경지 정리로 지금은 논 가운데 묻히고 말았다. 월롱에서 영태리로 오는 육교를 지나 약 100m쯤 가면 우편 논 가운데 있는 우물이 바로 공수물이다, 月籠面純祥里(英太里) 有一共 仁祖反正時 曾集同志 自長湍入京 飮比井水 故名 〈坡州郡誌〉   

질문[일화] 소개비냥의 장사의 일화

소개비냥은 파평산 북맥 임진강변에 우뚝 솟은 백석산(白石山) 절벽으로 그 아래 강물은 수심이 깊었으며 비냥 위로 좁은 소로길이 있어 겨우 한사람이 지나다닐 정도였다 한다. 바로 강 건너 장단 땅에 심승경(金承景)이라는 힘이 쎄고 활 잘 쏘는 한량이 살았는데 파주땅에서는 종 출신으로 '쇠'라는 상노와 전광교(全光교)라는 중인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힘이 남달리 세어서 상대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늘 한번 겨루어보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쇠는 주인 심부름으로 장단 김승경 집에 콩을 실어다주게 되어 소에 콩섬을 싣고 찾아가서 콩섬을 던져 깁승경을 죽일 마음을 먹었으나 김승경은 쇠가 항시 자기를 벼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충분한 경계를 하면서 대비하였다. 이리하여 쇠가 콩섬을 소등에서 내려 김승경에게 힘껏 던지면서 콩섬 받으시오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나 김승경은 사전대비를 하고 있던터라 선뜻 받아서 땅에 내려 놓았다. 이에 놀란 쇠는 힘이 나보다 세다면서 굴복하고 말았다. 전광세는 일상 때를 기다리면서 이 광경을 엿보고 있던 차에 마침내 장단에서 활쏘기 대회가 있어 전광세도 활을 메고 장단땅에 이르러 김승경과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김승경의 힘이 워낙 세어 패배하고 도망을 쳐서 임진강에 이르니 김승경이 뒤를 따르는지라. 그리하여 배는 없고 다급한 나머지 큰 나무를 뽑아 윗 둥지를 잘라 물에 띄워 강을 건너려 하니 이 때 백석산마루 꼭대기에서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면서 ‘전광세의 위급함을 보고 이를 구하고져 전광세 지금 내가 나간다’고 소리를 쳤다. 이 사람은 소리를 치면 50리까지 들린다는 큰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이 소리를 듣고 뒤따르던 김승경은 주춤하는 순간 옆에 있던 사람들이 김승경을 보고 저렇게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라면 힘이 얼마나 세겠느냐며 만류하여 분에 못이겨 주먹으로 바위를 내려치니 바위가 갈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김승경은 무서울 것이 없어 파주 장단을 드나들며 갖은 행패를 부렸다. 하루는 말을 타고 고랑포나루를 건너 소개비냥에 이르렀을 때 파주쪽에서 한 젊은 초립동이가 역시 말을 타고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비냥위에서 마주쳤다. 그때 상황은 김승경이 길 위로 올라서면 한사람은 비켜설 수 있는 자리였으나 이 초립동이는 전후좌우 도무지 비킬 도리가 없는 자리였다. 두 사람은 서로 ‘길을 비켜라’하고 버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김승경이 화를 내면서 젊은이를 발로 걷어차니 젊은이는 말과 함께 벼랑 밑 강물을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그러나 사람과 말이 물에 닿는 순간 젊은이는 말을 안고 그 높은 벼랑을 단숨에 뛰어 오르는 것이 아닌가. 김승경은 놀라서 말을 몰아 힘껏 도망했으나 그 젊은이에게 이내 잡히고 말았다. 젊은이는 ‘너 이 팔로 몹쓸 짓을 많이 했지?’하면서 한쪽 팔을 만지니 그대로 뼈가 부서졌다. 또 한쪽 다리를 만지며 ‘이제 그만 뛰어라’하며 만지는 순간 다리뼈도 부서졌다. 따라서 김승경은 병신이 되고 그 젊은이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 김승경은 아들 셋을 데리고 있는데 이 아들 셋이 모두 불량하여 행패가 심하였다. 김승경이 하루는 세놈을 불러 놓고 주먹크기만한 돌을 큰아들보고 가져오라고 하였다. 큰아들이 돌을 가져오니 김승경이 앞에 있는 큰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는 여기서 거리가 활 한마장 거리가 된다. 여기서 돌을 던져 저 나무를 맞추어 보라’고 하였다. 큰아들이 힘껏 던졌는데 돌은 나무에 맞아 나무 껍질이 벗겨지며 튕겨 나왔다. 둘째 아들도 던졌는데 돌은 겨우 나무 앞에 가서 떨어졌다. 셋째 아들이 던지니 돌은 중간 지점에서 떨어졌다. 이번에는 김승경이 그 돌을 주워서 한쪽 다리는 절고 한쪽 팔은 쓰지 못하는 병신이면서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던졌다. 돌은 공기를 헤치며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날아가 나무에 닿는 순간 총알처럼 나무에 박히고 말았다. 아들 셋이 입을 벌린채 놀랐다. 김승경은 조용히 말하였다. ‘내 아들아 내가 비록 병신이지만 너희 셋의 힘을 당할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너희 열 배도 더 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가 소개비냥에서 젊은이가 한번 만지는대로 팔과 다리가 부서졌으니 이 세상에는 힘이 센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아야 한다. 병신된 애비의 힘만도 못한 너희들이 감히 어디라고 힘자랑을 하며 행패를 부리느냐, 이러다가는 너희들도 애비와 같은 꼴을 당할 것이니 명심하라’하였다. 아들 셋은 아버지의 말을 명심하고 그후 아주 착한 사람이 되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현재 탄현면 대동리에서 전해지는 실화 비슷한 전설이다. 소개비냥의 전설은 우리들에게 귀중한 교훈을 남겨 주는 전설이다. 지금 대동리에 전찬욱씨가 살고 있는데 전광세는 바로 전찬욱씨의 조부이다. 전광세는 이곳에서 전봉삼이라 하였는데 이름이 둘이었다. 전광세는 키가 크고 얼굴이 길고 구렛나루 수염이 덥수룩하여 한번 보면 무서운 상이었다. 전광세가 큰 돌을 걸빵을 만들어 짊어지고 온 것을 그의 아들 삼형제가 힘을 모아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태풍이 강하게 불어서 사람이 날릴 지경이었다고 하며 현재에도 전씨들은 장사가 많다고 한다.  

질문[일화] 오두산에 얽힌 유적의 일화

오두산을 김포쪽에서 바라보면 흡사 노란 저고리 붉은 치마를 입은 젊은 색시가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배를 타고 건너와 보면 그 색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다시 돌아가 오두산을 바라보면 그 색시가 또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리하여 이를 ‘산삼의 장난’이라 말하고 있으며 또한 김포에서 오두산을 바라보면 큰 멍석을 말아 놓은 것 같이도 보이는데, 막상 건너와 보면 또 그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어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지네의 도술’이라고 말한다. 오두산에 아주 좋은 명당자리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어떤 사람이 이곳에 몰래 산소를 썼다. 그 뒤 그 집안에서 장사의 상을 지닌 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세살이 되면서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하며 그 아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일화] 순조대왕 인릉(仁陵)의 유적일화

 조선조 제23대왕 순조(純祖)는 정조24년(1800) 정조대왕이 승하하자 11세 당시 왕위에 올라 순조34년(1834) 11월 13일 45세로 승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대왕릉이 있는 이곳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2번지에 안장하 였으나 제24대 헌종대왕(1834~1849)을 거쳐 철종대왕이 등극하자 직접적인 양 부의 능제사로서 매년 참봉하게 되니 거리가 멀어 하루저녁을 자야하는 불편도 있거니와 초사토혈형국이라는 야산의 능자리가 공릉천이 흘러 휴율강물이 학당포로 유입되는 이 지역은 광할한 갯벌로 형성 조수물과 아울러 상선배가 오르내리는 아름다운 경관 그러나 매년 홍수가 지면 허허벌판에 물바다 를 이루게 된다. 이러할 때 바닥 갯벌에 서식하고 있는 수많은 갈게들이 능산에 올라와 분묘의 구멍을 뚫어 훼손하게 되자 철종 7년(1856) 서울 서초구 내곡동 (江南區 內谷洞) 태종대왕을 모신 헌능이 있는 곳으로 22년만에 천봉하게 되었 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일화] 강선정(降仙亭)과 신지강(神智江)의 일화

 우리나라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은 강원도 안변을 원류로 영풍을 거쳐 이천(伊川), 안협(安峽), 마전(麻田), 삭영(朔寧), 연천(連川)에 이르러 포천(抱川)과 합류 대탄(大灘)을 이루고 신지강(神智江), 구미연(龜尾淵), 표로하(瓢蘆河) 사미천(沙彌川)과 합류 술탄(戌灘) 고랑포 두지진으로 내려오는 신지강의 맑고 맑은 물은 양면에 푸른 돌이 암벽으로 수십리를 거쳐 둘러 싸여 그림과 같이 아름다워 고려 태조가 자주 찾아 궁중악으로 선유하였던 곳이라 한다. 또한 공민왕(恭愍王) 20년(1371) 3月에 왕이 장단에 나가 대장군 이화(大將軍 李和)에게 명하여 공인을 시켜 연천군 주월리(舟月里) 산언덕에 정자(降仙亭)을 건립케 하고 배를 타게 하여 상류를 오르내리며 기악(技樂)에 참여 즐겼는데 이때 상장군 김흥경(上將軍 金興慶)은 왕께서 손수 배를 저어 보시겠습니까 하니 나는 비록 즐기기는 하나 배를 저을 줄은 모른다 하였다하며 수시 배를 타고 여락(女樂)을 즐기였다는 아름다운 절경이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의 비첩(婢妾) 천하일색 미모가 아름답고 절색미인으로서 예절이 특이한 반야(般若)를 가까이 하여 모니노(牟尼奴)를 낳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신돈의 아들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곧 우왕(隅王)인 것이다. 고려왕조에서는 우(隅)를 빼앗아 왕후한비(王后韓妃)의 소생으로 하고자 하니 반야는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으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내가 낳은 자식을 어찌 한씨를 어머니로 하시겠느냐며 항의를 하니 태후(太后)가 반야를 하옥시켜 대간(臺諫)과 순위부(巡衛府)에서 감시케 하였는데 반야는 새로 지은 중문을 가리키며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한 것을 안다면 이문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하였더니 잠시 후 과연 문이 무너지니 사람들은 이상히 여겼다 한다. 삼사우사 김속명(三司右使 金續命)이 탄식하며 천하에 그 아비를 분간 못하는 자는 있어도 어미를 분간 못하는 자는 듣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드디어 이인임(李仁任)등이 반야를 신지강으로 데려가 강물에 던져 죽이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려 공양왕 4년(1392) 이성계(李成桂)는 조선조 개국당시 공양왕은 송도에서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와 고랑포에서 돛배를 타고 상류로 도망을 가다 구미연(龜尾淵)에 이르러 배가 파산하니 신주와 배는 강물에 가라앉고 왕은 구사일생 강언덕으로 기어나와 원주지방으로 가다 간성에서 피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후 이곳에서 신주를 빠뜨린 강이라 하며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연(龜尾淵)을 구연(仇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연천군 미산면 구미리에는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숭의전(崇義殿)을 건립하고 국가 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다.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