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료 한마당

전설모음

질문[유래] 사천내(沙川)에 얽힌 유래

구분 : 유래 해당지역 : 파주시 > 광탄면 대덕산에서 흐르는 분지천(芬芝川)과 반용산에서 화장사를 거쳐 내려오는 용둔천 (龍屯川)이 응봉산에서 흘러 합류하여 삼대천(三大川)이 되어 흐른다. 판문교(板門橋) 아래를 지나 송악산에서 흐르는 개울물과 선죽교 야다리(夜橋) 개울은 조산리에서 합류 태성천(台城川)이 되고 개풍 천덕산에서 내려오는 대우재개우물과 장단조라산에서 흐르는 냇물이 노하리에서 합류 동강이 되어 흘러 임진강과 합류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송도 서울 개항 당시에는 상선배가 송도 야말리까지 오르내렸으나 고려말 유래없는 대홍수로 산사태가 일어나 모래가 개울을 메우게 됨으로써 고려가 폐망하고 조선조 개국이후 사천(沙川)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질문[유래] 용맹을 떨친 유극량(劉克良) 장군의 유래

중국요제(堯帝)의 후손 한고조 유방(劉邦)의 41세손 송나라 병부상서 유전이 고려 문종 36년 경북 영일군에 정착 귀화하였으나 그의 8세손 국추(國樞)가 도첨의평리 (都僉議評理)에 이르러 공을 세워 백천군(白川君)에 추봉 백천으로 개관하였고 그의 후손 유극량의 아버지는 연안에서 살게 되어 연안인(延安人)으로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홍섬(洪暹) 대감댁 노비였으나 16세때 홍대감이 아끼는 옥배를 깨뜨려 꾸지람이 두려워 야간도주하여 새재에 이르자 난데없이 큰 호랑이가 나타나 덤벼들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 무렵 황해도 연안부송청에 토반으로서 유좌수(劉座首)라는 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일찌기 상처하여 속현(續絃)을 하지 못하고 홀아비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안장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술 몇 잔을 들고 거나하게 취하여 밤늦게 돌아오는데 송청 뒷산고개를 막 넘으려니까 호랑이 한 마리가 두 눈에 환히 불을 켜고 유좌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만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호랑이가 있던 곳으로 살그머니 다가가 보니 어찌된 일인지 어떤 한 처녀가 실신하여 쓰러져 있었다. 유좌수는 얼른 심장을 짚어보니 아직 죽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황급히 들쳐업고 자기집으로 달려와 안방에 뉘이고 얼마동안 기다리니 처녀는 그대야 정신을 차리는것이었다. 그때 유좌수는 처녀의 말을 듣고 호랑이가 간밤에 처녀를 등에 업고 천리길을 달려 이곳까지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라 믿고 부부가 되어 중종 26년 (1531) 3월 13일 유극량을 출산했다. 유극량은 남달리 영특하여 글공부도 잘하였지만 서출이라는 신분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떳떳이 부르지 못하였기에 그 어린가슴에 쌓인 생각은 오죽하였겠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동기의 천대와 세상의 멸시 때문에 16세되던 해 그의 어머니와 함께 송청(松靑)을 떠나 평산군 적암면으로 이주 나무장수를 하면서 책을 읽으며 무예를 닦았다. 20세가 되어 세상에 웅기를 펴고자 송도에서 공부를 더 할겸 여러모로 견주어 볼 생각으로 결심끝에 어머니와 상의 산간벽지를 버리고 송도로 가서 창령리(昌領里)라는 마을로 갔다. 가서보니 커다란 기와집 흉가 한채가 있었는데 밤마다 도깨비가 나오고 그 집에 들어사는 사람은 영락없이 송장이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아예 그 집에 살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이에 유극량은 그 집에서 살 결심을 하고 들어가니 동네 사람들이 극구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흉가의 안방에서 자리를 잡고 촛불을 환희 밝혀 글을 읽고 있는데 자정이 지나자 과연 도깨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 도깨비들은 끼리끼리 쑤근거리며 어떤 녀석이 살기 싫어서 죽으러 왔나보다 라느니 오늘 밤 황천길로 떠날 놈이 하나 있다느니 하면서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극량은 장검을 들고 미닫이를 열어 젖히며 ‘웬놈들이 이다지 소란스럽게 구느냐’하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이 꾸지람에 놀란 도깨비들은 한참이나 극량을 바라보더니 ‘에그머니 부원수님이시다’하며 기절초풍하여 줄줄이 도망치는데 뒤를 쫓아가 보니 뒤뜰안 장독대 밑으로 모두 숨어 버리는 것이었다. 날이 밝은 이튿날 곰곰히 생각하다가 일어서 그 장독대 밑을 파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는 금은보화가 한 궤짝 가득 쌓여 있었다. 이리하여 하루아침에 많은 재화와 큰 기와집 한 채를 얻어 금시 발복을 하였다. 그후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무술을 연마하여 마침내 11년(1556)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것이었다. “어머니 소자의 급제를 매우 기뻐하실 줄알았는데 울기만 하시니 어인 일이옵니까” 하니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씀이 “누가 내자식 등과를 싫다 할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걱정되는 바가 있어 이렇듯 눈물이 나는구나” 그 걱정이란 참으로 딱하고 애처로운 것이었다. 그 어머니는 극량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 세상의 법은 천민의 자식이 과거를 볼 수 없고, 급제를 할지라도 그 일이 드러나면 삭제될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러하니 어미로서 어찌 자식의 등과만을 기뻐하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극량은 어머니의 옛 상전을 속일 수 없다하며 그길로 한양으로 올라가 홍섬대감댁을 찾아가 석고대죄(席 待罪)를 하며 다시금 노복 (奴僕)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대감은 그의 솔직하고 강한 기개를 가상히 여겨 뜰에 내려가서 극량의 손을 이끌고 방안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주안상을 사이에 두고 칭찬의 말과 함께 극량모의 노비문서를 꺼내어 불살라 버린 후 홍대감의 주선으로 벼슬이 차츰차츰 올라 좌승지와 부총관, 충청도수군절제사를 거쳐 임진왜란(4월13일) 때에 조방장으로서 죽령을 지키다가 5월 4일 부원수 신할을 쫓아 임진강으로가 방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제찰사(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지휘하에 있는 부원수 신할이 끝내 임진강에서 익사하니 극량은 5월 4일 부원수가 되어 5월 17일 유극량 장군만이 고군단졸로 피흘려 싸우다가 날이 저물자 군졸들은 모두 흩어지니 한숨지어 수레 위에 걸터앉아 말하되 「이것은 내가 죽을 땅인가 보다」하고 칼을 집고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금석과도 같았다. 왜군들이 곳곳에서 몰아 닥쳐 눈물이 쏟아져 적시우고 분노를 참지 못한 장군은 장검을 들어 수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도리어 5월 18일 술시(62세)에 적장의 칼에 맞아 순절하신 거룩한 용장이시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예관을 보내어 초혼치제하고 군내면 송산리에 예장 경술 5월 병조참판에 증직 무의(武毅)라 시호를 내리고 임진강나루 언덕위에 조선충신 유극량 대첩비를 세웠으며 또한 송경에 순절사를 건립 천곡(泉谷), 송암(松岩)과 함께 배향케 하는 한편 유양비를 세워 길이 영혼을 달래케 하였다. 장군의 13대손 유순구는 백천에 살다 해방 후 월남한 실향민으로서 38선이란 철책이 가로막혀 수차에 걸쳐 파주문화원을 예방 임진나루 언덕 위 대첩비와 실전된 묘소를 찾으려고 40여년 동안 고민하면서 부단한 노력을 하시던중 대한노인회 파주시지부장 이규환씨로부터 의정부에 거주하시는 정창모선생에게 이러한 사연을 전달. 이를 알게 된 유순구는 선생주선으로 임진강이 흐르는 강언덕에서 묘소를 찾게 되어 일생에 소원을 풀게 되었다. 이는 오직 숭조정신이 투철한 자손으로서 효심이 지극하여 하늘이 감동하지 않았나 생각되며 찬양해 마지않는 바이다. 

질문[전설] 신화동과 쇠곳나루(金串津)에 얽힌 전설

 이 지역은 곡릉천의 맑은 시냇물이 쇠재독암뜰을 거쳐 흐르는 새재개울(金城川)은 금촌에서 교하로 건너 다니는 쇠곳나루를 거치게 된다.  옛날 교하군청이 금성리에 있을 당시 상선배(商船)가 쇠재를 오르내리었으나 매년 홍수로 말미암아 쇠재개울이 매몰되기 시작하자 이곳 쇠곳나루(金串津)에 상선배가 머무르게 되니 현 은행나무 사두혈(蛇頭血)이 있는 지역 일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짭짤한 시장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 내 많은 돈이 득실 거렸다하며 금이 꽂힌 쇠곳(金串)이라 칭하게 되었으나 구한말 행정구역 변경당시 뱀꼬리(蛇尾)부분에 신화만발형(新花滿發型)의 산소자리가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쇠곳(金串)은 신화(新花)로 개칭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거북바위에 얽힌 전설

교하 심악산(深岳山)은 옛날 경기 5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으로 유명한 산이다. 이 산은 상봉과 중봉(3태봉) 끝봉이 북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솟아있는데 봉우리마다 자그마한 내령이 뻗어있다. 교하면 산남리 47번지에서 어머니를 모시 고 사는 노총각 송사련(안당정승서고모의 아들)이 어느 여름날 중봉상에 있는 거 북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래 내령 거북뫼(고양 구산리)에서 두 마리의 청 룡과 황령이 올라와 자기 가슴에 안기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인지라 이상하게 생각하며 하산하였다.이 날 밤 바로 이 동네 34번지에 살고 있는 안당 정승댁에 기고가 있어 일을 도와준 뒤 집으로 들어왔는데 비녀(연일정씨)가 제사음식을 가 지고 홀로 있는 자기방으로 들어오자 설레는 마음에 욕정을 참지 못해 이를 겁탈 한 후 같이 살게 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대학자 송익필, 송한필을 생산하였다 한다. 

질문[전설] 도라산(都羅山)에 얽힌 전설

장단읍내 뒤 백학산 서맥내령 맑고 맑은 사천내가 흐르는 냇가 벌판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 156m 도라산 고지는 주위 수목이 우거져 경관이 아름다워 주민들이 여름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명산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 돠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조 개창 이후 도라산 마루에 봉수대를 설치 군인들을 주둔시키고 국난시에는 봉화 신호로 송도와 파주 봉수대를 거쳐 한양으로 소식을 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 이곳은 남북이 갈라진 38선을 지키기 위하여 정상에 전망대를 설치 국군들이 수호하고 있으며, 제3땅굴과 아울러 실향민과 여러 지역 관광객들이 자주 찾아오고 있다. 그러나 창화사는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경순왕릉은 영조대왕이 복원한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군인들이 수호 관리하고 있다. 

질문[전설] 심악산과 천자지지에 얽힌 전설

 교하면 동패리에 소재하고 있는 심악산은 한강하류에 있는 산으로 동편은 동패 리, 서편은 서패리, 남편은 산남리등 3개리가 둘러 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봉우 리와 동체는 마치 대호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물위 에 떠있는 큰 군함같기도 하다. 또한 장군 영병 비룡상천형이라고도 한다. 산봉우 리 주위는 바위로 둘러싸여 있으며 중심부 10여평 남짓한 편편한 곳이 있는 이 자 리는 수십자를 파도 비세황토 흙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곳이 풍수지리설로 천자가 나올 자리(천자지지)라 전해져 욕심내는 사람들은 밤중 남몰래 수차에 걸 쳐 시체를 암매장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자리에 시체를 매장하면 산 이 울며 동네에서 병고가 일어나 동네 사람들을 일제히 동원하여 상봉에 올라 시 체를 파헤쳤다 한다. 조선조 말 김포에 살던 예안이씨 이지열(李志烈)이 이 마을 에 들어와 훈학을 하였으나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곳에 몰래 시체를 암매 장하였다. 그러자 이 동네에 사는 김면제(金勉濟) 성균관박사 댁(成均館博士宅) 하인이 일자무식한 사람인데 별안간 미쳐서 이지열이가 여기다 산소를 써서 큰일 났다며 동네를 뛰어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산에 올라가 파헤쳤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지금은 아예 묘를 쓸 생각조차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한 이 묘자리 턱 바로 아래 발복지지 묘도 2개소가 나란히 있다 한다. 옛날에는 이 산 주위로 물 이 흘러 한강 가운데 있는 섬으로 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한강 물을 막고 있 다하여 당초에는 수막산(水漠山)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조에 내려와 언제나 홍 수가 있을 때에는 한강물과 조수물이 넘쳐 수막산이 물 속에 잠기게 됨으로 깊은 물에 들어갔다 하여 심악산(深嶽山)이라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 오악(송 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중에 하나로 불리우고 있다. 그후 조선조 숙종대왕 시 절 왕궁에서 학을 기르다가 학 두 마리가 도망을 치자 궁궐에서는 이 학을 찾기 위 해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으러 다니다가 심악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잡아간 후 숙종대왕께서 이 산에서 학을 찾았다 하여 심학산(尋鶴山)으로 명명하여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항간에는 수막산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각종 문 헌에는 심악산으로 명기하고 있으며 이 심악산 동편 중턱에는 유명한 법성사(法 成寺)절이 있고 위에는 속병이 잘 낫는다는 신기한 약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수 시로 모여들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조선조에 유명했던 송구봉선생께서 이 산의 정 기를 받아 탄생하여 성장하신 명산이다. 따라서 일설에는 송구봉선생이 출생할 때 정기를 흡수하여 이 산에 초목이 일시 고사(枯死)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질문[전설] 임진나루 뱃사공의 전설

임진나루는 옛날 한양에서 송도를 거쳐 의주로 가는 국도로서 교통이 빈번한 곳 이었다. 여기에서 뱃사공을 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옷차림과 거동만 보아도 어떠한 사람인지 잘 알아 맞추기로 유명하였다. 그리하여 다른 데에서 뱃사공노릇을 하는 짖꿎은 사람이 하루는 얼마나 잘 알아보는지 시험을 하고저 신분을 속이고 양반으로 가장 의관을 갖추고 임진나루 뱃사공을 찾아 ‘여보게 나를 좀 배로 건너주게’ 하고 반말을 하였다.  그러나 김씨라는 뱃사공은 부지런히 배를 대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누구보고 반말이냐’며 화를 내는지라 그리하여 변장한 양반이 하는 말이 ‘이놈아! 감히 누구 안전에서 행패냐’ 하니 ‘너는 아무리 양반 인체하여도 나와 같은 뱃놈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래 네가 어찌 그런것을 잘 아느냐!’ 하고 반문을 하자 임진강의 뱃사공이 하는 말이 ‘너는 수염이 한쪽으로 구부러졌고 노를 젓느라 고개가 돌아간 것이며 강바람에 수염이 돌아간 것을보아 너는 나와같은 뱃사공이 아니냐?’ 하니 참으로 귀신같이 맞힌다면서 껄껄대며 서로 웃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팔학곡(八學谷)에 얽힌 전설

옛날 조리면 봉일천4리 산21번지 맑고 맑은 공능천이 흘러 고기배가 오르내리는 명봉산 서북맥 언덕 벼랑 위 산림이 우거진 한적한 산골짜기 산정에 김정국(金正 國)이란 사람이 초당을 짓고 공부를 하였다. 선생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제 (思齊) 또는 팔여거사(八餘居士), 본관은 의성(義城), 연(璉)의 아들이며 안국(安 國)의 아우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서 중종4년(1509) 별시문과에 급제 사 가독서를 한 후 이조정랑, 사관, 승지등을 걸쳐 1518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이듬해 중종 14년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가 경빈박씨 후궁들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들과 당파를 조직 조정을 문란케 한다는 무고를 퍼뜨려 능주로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붕기 조광조를 신면할 것을 항소하는 기묘사화를 일으킬 당시 선생도 이에 연루되어 삭직 고향 인 현 고양시 관산동 지영리로 내려와 학문에만 전념하고 있었으나 많은 선비들 이 몰려들어 지도를 하게됐다. 그후 중종 32년(1537) 복관되어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편민거폐(便民去弊)라는 시정책을 건의 대부분 시행케 했으며 2년 후 병조, 공조, 참의를 역임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이어 예조, 병조, 형조 참판을 지내고 중종 36년에 죽으니 장단군 진동면 하 포리에 안장 후 좌찬성에 추종 문목(文穆)으로 시호되었으며 성리대전절요(性理 大全節要), 역대수수승통지도(歷代授受承統之圖),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사제척언, 기묘당적(己卯黨籍)등을 편집한 유명한 문인이시다. 당시 김정국(金 正國)을 비롯한 민순(閔純) 남효온(南孝溫) 정지운(鄭之雲) 홍이상(洪履祥) 이신 의(李愼儀) 이유겸(李有謙)등 8현들이 이곳에서 수학을 하였으며 현 고양시 관산 동 문봉리에 숙종14년(1688) 후생들이 문봉서원을 세우고 숙종 35년(1709) 사액을 받아 이분들을 배향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지금까지 팔학곡(八學谷)이라 전하고 있다.  

질문[전설] 봉서산(鳳棲山)에 얽힌 전설

 봉서산은 봉황새가 깃드려 즐기며 노래하던 곳으로 호칭하여 내려오고 있다. 이 산 정상에는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하나는 장사가 먹었다는 장사우물로서 산성에서 사용하였고 또 하나는 전대우물( 帶水)로 수원이 많은 약수로 현재 문산과 파주읍 주민들이 즐겨 마시고 있으나 이 우물이 얼마나 깊은지 명주실 한타래를 풀어도 닿지 않는다는 깊은 우물로 측량할 수 없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 산마루에는 장사가 가지고 놀았다는 몇 개를 포개놓은 듯한 공기바위와 용마바위등이 있으며 벌판 가운데 우뚝솟은 해발 300미터 가량의 산으로 산림이 우거진 아름다운 명산이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문산포구를 바라보는 군사 요충지로 산성이 있었으며 임진왜란당시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승전을 거두고 이 산성으로 돌아와 수비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 자연보존을 하여야 할 이 지역이 군사기지로서 산성주위가 모두 훼손돼 안타까운 실정이다.   

질문[전설] 혜음령(惠陰嶺) 고개에 얽힌 전설

   이 혜음령 고개는 옛날 이 고개 중턱 좌측에 혜음사(惠陰寺)가 있었던 곳으로 광 탄면 용미리 벽제관을 넘어 다니는 고개이며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국도이다. 이 고개 주변에는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으슥해서 도둑들이 수시로 나타나 행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다. 힘이 센 두 도둑이 있었는데 하루는 많은 장물을 으슥한 곳 에다 숨겨놓고 서로 나누어 가지자고 하였으나,  욕심이 많은 도둑들은 각자 마음 속으로 독차지하고자 흉계를 꾸미는데 술을 한잔 나누어 먹고 분배하자는 두 도 둑은 한 사람이 술을 받으러 가서 술에 독약을 타서 가지고 올라오는데 산에 남아 있던 도둑은 칼을 준비해서 술을 가지고 오는 도둑을 숲에 숨어 있다가 죽이겠다고 결심을 하고 술을 사가지고 올라오는 도둑을 몰래 뒤에서 칼로 찔 러 죽이고 흥이 나서 술을 가지고 올라가 마시고 죽으니 두 도적은 모두 욕심으로 인하여 사라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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