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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모음

질문[유래] 금촌(金村)의 얽힌 유래

 학령산하(鶴翎山下) 금촌리는 한일합방 후 현 파주시청이 소재하고 있는 골짜기로 옛날 교하현청이 아골(衙谷)에 있을 당시 말의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던 지역인 마무리(馬武里)에 10여가구가 살고 있었던 지역이다.  홍수가 범람할 때면 도감벌 쇄재 개울물이 넘어 흘러왔다고 하는 무너미고개(水輪嶺)에 7~8호, 금촌초등학교로 넘어 다니는 고개 샛곳 양편 산기슭에 드문드문 몇 집이 있었으며 현 금촌시장은 논밭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융희 4년(1910) 일제침략으로 말미암아 한일합방이 될 무렵 일본인들이 광무 9년(1905) 11월5일 경의선(499km)의 개통 당시 이곳에 역명을 정하고자 40여호가 살고 있는 이 역 건너편 새마을(新村洞)에 사는 촌노(村老)에게 이 부락명을 물으니 새마을이라 하자 새(新)을 쇠(金)로 알고 쇠마을(金村)역으로 정하게 되었다 한다. 일제치하 금촌학교(구 도립병원터)가 창설되었고 8·15 해방과 6·25동란을 거치면서 파주시청을 유치하게 되니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 현 금촌의 현상이라 하겠다. 풍수학설에 의하며 학령산(鶴翎山)앞 학의머리(鶴頭) 부분은 금산(金山)으로서 금의 마을(金村)이 되었다고도 유래하며 돈이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면 많은 돈을 벌게 되며 10년안에 돈을 벌어 나가야지 그대로 있으면 오히려 망한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유래] 검산리(檢山里)와 조음발동(助音伯)의 유래

 시조 신성용(申成用)은 고려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를 역임하고 누대 고령에서 세거(世居)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고령(高靈)으로 하였다. 칠세손(七世孫)인 엄헌공 신장(嚴軒公申檣)은 1382년(우왕 8)에 탄생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능숙하여 1394년(태조 3) 부시에 장원, 1402년(태종 2)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左郞)에 있다가 퇴임 후 전라도 나주로 낙향하여 서당에서 유생들을 지도하던중 1402년(세종 2) 직제학에 제수되자 처와 오형제(孟舟, 仲舟, 叔舟, 松舟, 末舟)를 두고 한양으로 상경 이어 공조참판으로 승진 남산지곡(南山之曲)을 짓는 등 유학에 조예가 깊어 글씨도 잘 써서 대제학에 발탁되어 오래 머물렀으나 1433년(세종 15) 52세로 세상을 떴다. 나주에서 1,000리 길이라 처와 아들 맹주(21세), 중주(18세)만이 상경 장례를 치루고 이 곳(현 검산리 조음발이)에 모시게 되어 시묘를 마치고 난 얼마후 신숙주(申叔舟) 모친(신장부인)마저 돌아가니 역시 맹주와 중주 형제가 올라와 쌍분으로 장례를 모시게 되었다. 시묘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궁중이 어수선한 때이라 묘비를 파묻고 분묘와 묘역을 파헤쳐 흔적을 숨기고 암표만을 남기고 고향인 나주로 돌아왔다. 그러나 맹주와 중주가 조사(早死)하므로 묘소를 찾을 길이 없어 실종되어 오던 중 신숙주가 1439년(세종 21) 등과에 올라 단종 당시 도승지를 역임하다 세조가 등극하자 이를 쫓아 병조판서에 오르고 1457년(세조 3) 좌찬성에 있으면서 단종과 금성대군을 처형할 것을 모의하던 한명회와 권람이 강력히 주장, 금성대군은 사사하고 단종은 영월로 유배되어 자진(自盡)케 하였으며 1458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어 예종이 즉위하자 원상(元相)이 되어 남이장군을 숙청하고 1471년(성종 2)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영의정에 재임되었다. 그후 동생인 송주, 말주를 시켜 말만 들었던 지역과 선친 묘소를 대강 일러주면서 기필코 찾도록 하니 즉시 활을 메고 두 형제는 월롱산을 두루 이잡듯이 찾다가 어느 날 이곳(현 조음발이) 골짜기를 들어갈때 중이 집집마다 괭매기(중 시주 밥그릇)를 치며 시주를 받는 것을 보고 옳지 이 도승에게 물어 보리라 하고 달려가서 혹시 신장묘소를 아느냐고 물으니 괭매기를 두드리고 합장하며 말하기를 이 산 윗 골짜기에 모시었다는 말만 들었다 하며 사라졌다. 이에 허둥지둥 올라가다 마침 꿩 한 마리가 날아가서 활을 당겨 쏘니 묘소 있는 곳에 떨어지는지라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 근방의 산혈맥을 살펴보니 묘소가 있을 법하여 여기저기 흙을 파는 도중 큰 돌이 나와 헤치니 비석이라 이를 씻어 자세히 본즉 신장 선친의 묘비가 틀림없었다. 수십일 동안 고생 끝에 찾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상경하여 형인 숙주 영상에게 사연을 고한 후 즉시 분묘를 하고 비석을 세워 시향을 받들게 되었다 한다. 그후 신장묘를 찾기위해 이산 전체를 검색하였다 하여 검산(檢山)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도승의 괭매기 소리의 도움을 받았다하여 조음발이(助音鉢)라 호칭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그 후 엄헌신장(嚴軒申檣)선생이 훈학하던 나주에 서당을 지었는데 설제서원(雪齊書院)으로 사액되어 후학들이 매년 배향을 지내고 있다 한다.    

질문[유래] 문산포(汶山浦)에 얽힌 유래

이 지역 문산포는 삼국시대로부터 문산읍 선유리 동초등학교 자리에 술이홀현, 서원군 원평군 원평도호부 청사가 있을 당시 사목리 포구를 통하여 장단을 왕래하였으나 임진강의 강 흐름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문산읍 하동에 포구를 설치 수운(水運)의 중심지로서 풍덕, 김포, 강하, 고랑포, 연천, 송도와 한양등지를 황포 돛대로 왕래하면서 상선배와 농산물의 물물교환의 집결지로 대시장이 형성되어 호황을 이루고 이어 내려왔다.  따라서 당동리에 여러 무당이 집결 해마다 호대감 놀이를 베풀어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온다. 이에 따라 조선조 개국이후 원평도호부 청사는 파주목으로 승격됨에 따라 파주읍 주내동으로 이전되었으나 경의선 복선으로 인하여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유래] 불환정(不換亭)에 얽힌 유래

  삼선산(三仙山) 양날개를 펼친 좌청룡 내령 끝머리 서남향 임진강변의 우뚝솟은 봉우리에 마치 거북목아지를 하늘로 내민듯한 모양을 한 석곡(石串) 거북산이 있는데 이곳은 송도에서 내려오는 사천내(沙川)가 흘러 동강(東江)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경관이 아름다우며 임진강의 조수와 파도에 물결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이러한 가운데 중종 10년 좌승지 황성신(黃省身)은 장단면 석곡리 구룡동(九龍洞)에 낙향, 이곳에 정자를 짓고 바꾸지 않는다는 뜻에서 불환정(不換亭)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정객, 시인, 학자들과 자주 시유와 낚시로 소일을 하면서 유생들에게 불굴의 정신을 교화 지도하였다. 또한 학자로 유명하였던 그의 5대손 황헌(黃櫶)선생께서는 인근부락에서 모여든 수백명의 유생들을 훈학하면서 조선조 말엽까지 이어내려 왔으나 동난으로 소실되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질문[유래] 임진강변 내소정 팔경시(來蘇亭 八景詩)의 유래

 이 시는 내소정(제창군과 신승선 건립)에서 호곡 남용익 (숙종대왕때 명시인) 이 작시한 것으로 남용일은 대제학을 겸한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인형왕후 폐출당시 이를 반대하다가 명천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시호는 문헌공이다. (1)화석정춘(花石亭春)  화석정전화사신(花石亭前 花事新) 화석정 앞뜰에는 꽃이피어 새로운데  독래음상유한인(獨來吟賞 有閒人) 쓸쓸한 나그네 홀로와서 시를 읊으니  유방거세무상식(幽芳擧世 無相識) 온 세상 그윽한 높은향기 서로 알지 못했으며  가석선생거후춘(可惜先生 去後春) 애석하다 선생님 가신뒤에 새로 알았네. (2)장암수균(場岩垂鈞)  수균춘만백척대(垂鈞春灣 百尺臺) 봄날 강어귀 높은데에 낚시줄을 드려놓고  득어장욕고심배(得魚將慾 沽深盃) 고기를 잡으면 이에 큰술잔 사려고 하였는데  방인불해오심사(傍人不解 吾心事) 옆에있는 사람 나의 심사 알지도 못하고  만도동강물색래(漫道桐江 物色來) 거짓말로 동강에서 색다른 물건이 온다하네 (3)송암청운(松巖淸雲)  하처염운점점부(何處炎雲 點點浮) 여기저기 뭉게구름 점점이 떠있는 데  원산여하흡영두(遠山如畵 恰盈頭) 먼산은 그림같이 아름답게 솟구쳐있네  횡차망안지다의(橫遮望眼 知多意) 곁눈으로 바라보니 사연도 많이 있은 것 같은데  원야소인조고수(怨惹騷人 弔古愁) 근심많은 사람 옛수심지어 죽지 않을까 의심나네 (4)장포세우(長浦細雨)  장포세우청비비(長浦細雨 晴 비비 ) 장포뜰에 가랑비 개었다가 눈이 펄펄 날리고  백로횡분초색비(白露橫分 草色飛) 백로들은 가로질러 벌판위로 날아가네  어자불수풍랑기(漁子不愁 風浪起) 어부는 풍랑이 일어나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익선요환록사의(依船遙 喚 綠사 衣) 뱃전에서 우장옷을 내오라고 소리를 치네 (5)동파고역 월당루(東坡古驛 月當樓)  동파고역월당루(東坡古驛 月當樓) 동파옛역 마루에 달이 비쳐 명랑한데  처처인가간상구(處處人家 看上鉤) 이곳 저곳 인가에는 발을 걷어 올리누나  일점규성간불원(一點圭星 看不遠) 하나의 큰별만이 멀지않게 보이는데  영소응인광한유(令宵應人 廣漢遊) 오늘밤 맞이하여 광한(광한루)놀이 하여보세 (6)적벽선유(赤壁船遊)  적벽기두경부주(赤壁磯頭 更浮舟) 적벽이 둘러쌓인 강에 다시 배를 띄우니  소산거후상풍유(蘇山去後 尙風遊) 소동파가 간 뒤에도 풍류는 여전하네  파잔월백개양야(波殘月白 皆良夜) 파도는 잔잔하고 명랑한 달밤 모두 좋으니  불필황강임술추(不必黃岡 壬戌秋) 황강땅 임술지추만은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 (7)동원설(桐園雪)  동원모설백애애(桐園暮雪 애애) 동원에 날이 저물어 흰눈은 환히 비치는데  망이평파제색개(望裏平坡 齊色開) 편편한 언덕위를 바라보니 구름없이 개었구나  입야강비종불엄(入夜江扉 終不掩) 밤이되도 강가에 있는 집 싸리문이 열렸으니  섬계의유자유래(剡溪疑有 子猶來) 아마도 섬계땅의 왕자(子猶)오기를 바람이니라 (8)진사효종(津寺曉鍾)  진두사격백설층(津頭寺隔百雪層) 나루 위에 높은절은 백운의 층계로서 가렸으며  반야도종유노증(半夜嶋鍾有老增) 한밤중에 종이 울리니 노승이 있는것이리라  불시고소성외박(不是姑蘇城外泊) 이 고소성 밖에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련만  한천낙천우어등(寒天落天又漁燈) 찬하늘에서 달이지니 또한 어등이 비치누나  ※ 이 시는 당나라의 장계(張繼)의 풍고야박시(楓稿夜泊詩)를 비유한 것임 신승선(愼承善) 1436(세종 18)~1502(연산군 8) 〈조선〉문신. 자는 자계(子繼)·원지(元之), 호는 사지당(仕止堂), 본간은 거창(居昌), 관찰사 전(詮)의 아들, 임영대군(臨瀛大軍:世宗 3男) 의 딸과 결혼, 1454년(단종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돈령부승(敦寧府丞)이 되고, 1456년(세조 2) 한성부 우윤(漢城俯右尹)을 거쳐 병조참지(兵曺參知)로 문과중시 (文科重試)에 장원, 이해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했다. 이듬해 이조와 공조의 참판(參判), 1468년(예종즉위) 다시 병조 참판이 되어 익대공신(翼戴功臣) 3등이 되고,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진후 다음해 병조 참판 겸 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3등이 되었으며 1476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79년 평양 선위사(宣慰使)를 거쳐 1481년 행동지돈령부사(行同知敦寧府事)·공조 판서를 역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1484년 빈객(賓客)을 겸직, 2년후 병조판서로 특진관(特進官)을 겸하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에 책봉 되면서 좌참찬(左參贊)에 승진, 이어 행(行)예조 판서· 사소대장(四所大將)·이조판서, 1494년 우의정에 올랐다. 1495년(연산군 1) 산릉간심사 (山陵看審使)를 겸직,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을 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고, 1497년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시호는 장성(章成).   

질문[유래] 파주 염씨(坡州 廉氏)시조 근원 유래

  파주염씨(廉氏)는 우리 파주시와 연관이 깊은 성씨중의 하나이다.해동역사등 기록을 보면, 염씨성을 최초로 가진 사람은 낙랑군때의 '염사치'인데, 나라에 공을 세움으로써 광무제가 염씨 성과, 밭과 집 및 관모를 하사했고, 염사읍군에 봉했으며, 거주지는 낙랑군 함자현(지금의 파주 파평) 이라고 되어있어 이 때부터 파주에 염씨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파주염씨의 시조는 염형명(廉邢明)으로,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초까지 봉성(지금의 파주)에서 살면서, 고려 개국시의 공적으로 삼한공신에 책록되었으며, 대사도에 오른 분이다.그의 후손인 염제신(廉悌臣)은 1304년(고려 충렬왕 30)에 이곳 봉성산하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며 기골이 장대 총명하여 11세때 원나라에 들어가 고모부말길 평장사(姑母夫末吉平章事)의 집에서 10년 동안 수학을 하는 한편 태정황제를 수년간 시종하며 총애를 받았고, 어머니를 만나러 3차례 귀국뒤에 다시 들어가 상의사(尙衣使)로 근무하다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영구 귀국을 청하자 정동성랑중(征東省 郞中)에 임명되어 돌아와 고려 충숙왕의 신임을 받아오면서 벼슬길에 올라, 충목왕 때는 유석익대공신으로 삼사우사찬성사(三司右使贊成事)를 역임하고, 공민왕때는 좌우정승(左右政丞)을 거쳐 단성수의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도첨의 문화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都儀 門下侍中)에 이르러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출장입상으로 내외를 평정한 공적으로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공민왕이 친히 유상(遺像)을 그려주었는데, 지금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다.염씨 후손들은 이 염제신(廉悌臣)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시호는 충경공이고, 목은 이색으로 하여금 묘비문을 쓰도록 봉교서(왕의 하교에 의거 글을 씀)가 내려져,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묘소앞에 신도비가 세워졌다고 한다.이로 인하여 본관(本貫)을 봉성에서 곡성(曲城)으로 하다, 지명 개칭에 따라 서원(瑞原)으로 되었고, 다시 종중결의에 따라 파주(坡州)로 개관(改貫)하게 되었고, 파주염씨는 단일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http://www.pajooyom.com 수록   

질문[유래] 우계(牛溪) 선생의 유적 유래

우계(牛溪)선생은 중종 30년(1535) 6월 25일 한성 순화방에서 태어났으며 중종 39년 (1544) 9월 9세 때에 아버지 청송(成寸琛)선생이 파주 우계로 이주하게 되어 아버지에게 글을 배워 스스로 자습하여 경서와 문사에 뛰어났다. 17세 때 순천군수 신여람(申汝襤) 의 딸 고령신시와 결혼하였으며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급제하였는데 그 당시 시장(時場) 울타리에 구멍을 뚫어 드나드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기며 과거를 포기하기로 결심 휴암(白仁傑)선생에게 상서(尙書)을 배우면서 학문에 전념 율곡(栗谷) 선생과 교유를 맺었다. 27세때 모상(母喪)을 입었으며 30세때 아버지 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시묘를 살고 선조 1년(1568) 2월 34세에 이르러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선서참봉으로 등용 목청전 참봉으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 원서, 장영, 적성현감 등으로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은하였으며 37세때 그의 명성이 날로 높아져 조헌(趙憲)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도들이 모여들어 서실의(書室儀) 22조문을 벽에 걸고 제자를 지도하였다. 선조 5년(1572) 율곡 선생과 9차례나 서신 왕복으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선조 6년(1573)에 공조좌랑에 제수되어 장영, 지평을 역임하였다가 사임한 후 선조 7년 공조정장, 통예원 인의(引義)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서를 올렸으며 선조 8년 7월 공조정랑에 소명되어 부득이 역임하다 9월에 사임 파산으로 돌아왔다. 그후 주부, 장영, 첨정등에 계속 불렀으나 사은하고 47세때 종묘령으로 상경하여 폐임 선조 15년(1582) 집의, 사정 병조참의 이조참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득이 잠시 머무르다가 사임 파산으로 돌아왔고 11월에 이조참판으로 특배되었고 12월에 사은하였지만 선조 17년(1584) 정월에 율곡이 사망하여 2월 사귀(辭歸)를 청산하고저 하였으나 불허되어 동지중추부사를 역임 귀향할 것을 청하여 왕의 윤허를 얻어 귀향하였으나 왕이 다시 상경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사직서를 올린 후 계속하여 경기감사 이조참판 첨지중추부사로 배수되었으나 모두 사은하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의 아들 문준(文濬)을 불러 “내가 국난을 당하여 궐하(闕下)에 자진하지 못하니 군신의 분기를 회복할 곳이 없다. 그러니 대가(大駕)가 만약 서쪽으로 향해 이곳을 지나면 나는 당연히 길가운데서 곡 하다가 대가를 따라갈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죄척지신(罪斥之臣)이 또한 감히 스스로 방면할 길이 없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5월 20일 선조대왕께서 서울을 떠나 날이 저물어서 파주를 지나 임진강을 건너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 뒤 4월 29일에야 대가가 지나갔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안협, 이천, 연천, 삭영 등지를 전전긍긍 폐난하였다. 그러던중 7월에 세자가 이천에서 체류하면서 선생을 불렀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고 답자만을 올리니 세자 명령으로 개성 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으며 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양 세자 부름에 10월 선천에 도달하여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를 따라 갈 것을 청하였다. 대조에서는 우계가 선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우참찬에 특배하였으나 11월에 순천에 도착 후사를 부탁하고 의주로 행조 한 후 우참찬의 직을 사은한 뒤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대가가 정주로 돌아갈 때 병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영유로 와서 대죄하였다. 5월에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거쳐 선능과 정능을 봉심하고 돌아올 때 재령에서 병으로 머무르다가 9월 해주 행조에서 복명하였다. 대가가 환도할 때 석담정사(石潭精舍)에 우거(寓居)하 니 율곡 문인과 제생들이 특강을 청하여 교수하였다. 환도후 좌참찬으로 임명 비국당상 (備局堂上)을 겸하였다가 사직을 청하니 윤허되지 않아 우참찬으로 전직되어 사직서를 올렸으나 불허되어 용산으로 나와 결해소(乞骸疏)를 올리고 병으로 서강을 출발하여 연안각지에 우거하였다가 파산으로 돌아온 후 선조 31년(1598) 6월 6일 파산서당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주읍 향양리에 안장되었으며 인조 6년(1628) 파산서원에 배향되고 인조 11년(1633) 좌의정에 증직 문강으로 시호가 내려진 후 숙종 8년(1682) 율곡 선생과 함께 문묘에 승무되었다. 선생은 평생을 유가정신으로 수기의 실천 철학과 인심도심(人心道心)에 기본 바탕을 확립 성리학과 경제사상을 불어넣어 충의의 선비로서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위대한 유학자 대가이시다. 선생의 사당이 있었으나 1950년 6·25동란으로 소실된 이후 사숙공파(成世純)종회가 중심이 되어 복원계획을 세웠으며 다행이 1978년 7월 16일 우계 선생 묘역이 경기도 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됨에 따라 우계 사우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 정부 보조금 2,500만원과 성금 2,500만원으로 1987년 6월 11일 파주읍 향양리 묘하에 사우가 준공되어 숙원사업이 완수 정화되었으며 이날 경기도 관계관과 파주시장 각기관 사회단체장 본손을 비롯하여 유림 수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낙성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질문[유래] 독립투사 박찬익(朴贊翊)의 유래

박찬익(朴贊翊)선생은 서기 1884년에 파주읍 파주리 마산동에서 명문가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시다가 1904년 서울 관립상공학교에 재학중 항일사상이 투철한 선생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모의하다 퇴학을 당하였다. 1906년 안창호, 이시영, 이회영, 이동영, 신채호 등이 조직한 신민회에 가입한 후 다시 배움을 결심 1908년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한 후 동년 8월 29일 국치의 한일합방이 조인되니 선생은 만주 용정으로 망명 북간도에서 혁명 선배 이상설, 배순 등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대종교 도사교(都司敎) 라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大宗敎)에 입교하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 선양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중국 관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으로 화용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인학교를 설립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피임되어 성장(省長)과의 담판으로 대종교 탄압이 융화되니 일경의 주목이 날로 심하여 북간도를 떠나 길림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상해에서 신규식과 제휴하여 양국에 뜻 있는 청년들을 규합 동제사(同濟社)를 창립 복업정일(復業精一)이란 중국명칭을 가지고 행세하였다. 1918년 신규식과 함께 손문의 북벌에 참여 신해혁명이 성공되어 동맹회 지도급 인사들과 가깝게 되어 중국의 여러 무관학교에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켜 독립군 간부 양성에 기하였다. 신규식의 비밀지령(파리평화회의 사절파견, 3·1운동 등)을 받아 가지고 서북간도 및 노령(露領)등지에 있는 독립지사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국내의 3·1독립선언과 동경 유학생들의 조선독립 청년단 명의 2·8선언에 앞서 길림에서 서일, 여준,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황상규, 유동설 등 39인의 명의로 한국독립을 선언하고 선언서를 국내 및 미주, 로영 등지로 우송하고 또 대한 독립의 군무를 조직하여 파리회의에 전문을 보내어 한국독립을 청원하였다. 다음해 3월 1일 국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동월 하순 선생은 이동영, 이시영, 조성환, 조소앙, 김동삼, 조완구 등 30여명의 동지들과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10일 임시 의정원으로 피선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육성에 노력하였다. 동년 4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회의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을때 선생은 박은식, 신채호, 송정도, 조성환 등과 같이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정의단 단장 서일은 1919년 8월 7일 왕청련에서 현쳔목, 김좌진 등과 대한 군정서를 조직하여 만주에서 임시정부로 교민 자치와 무장활동을 전개하자 총재 서일과 총사령 김좌진과 교의가 깊은선생은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면서 군정서 외교처장의 중임을 맡아 임정과 군정서 사이의 외교를 전개하여 동년 12월에 대한군정서가 임정 산하로 들게 되어 북노군정서로 개편 독립운동 노선체제를 갖추었다. 1921년 7월 7일 임시정부 외무부의 사무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무총장 신규식은 국무 총리를 겸직)외교 임무를 전담하여 주로 대중외교에 치중하였다. 동년 8월 임시정부의 재정이 궁색하게 되자 선생은 안창호와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상해 및 대만교포들에게 군자금을 의연하도록 권하는 한편 조소앙과 중국 국민정부 요인들에게 우리 독립당의 주의강령을 설명하고 원조를 청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하였다. 동월 13일 태평양회의 외교 후원회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임되어 태평양회의 만국교육대회, 세계신문대표자회의에 출석하여 한국독립을 선전 활약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하기도 하였다. 동년 중국 국민당 손문이 광동에 중국호법 정부를 수립하자 동년 11월 18일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겸 외교총장직에 있는 신규식이 임정에 특파 전사로서 호법정부를 예방할 때 선생은 부사의 자격으로 광동에 가서 임정에서 호법정부를 정식승인함과 동시 호법정부로부터 임정을 정식 승인 받은 외교활동을 보좌함에 성공하자 선생은 대표에 임명되고 1922년 2월 7일 특파 교섭원에 임명 대중외교를 전담하여 활약하다가 동년 9월 신규식이 서거하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부터 복순(僕純)이라 이름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 의거로 일헌병에 체포선풍이 일자 김구선생과 임정 요인들을 피신시키는데 중국정부와 교섭하여 많은 협조와 편의를 얻었으며 우리 독립운동의 실적을 중국 정부에 크게 선전하여 또한 큰 효과를 얻었는데 김구선생도 후일의 술회(百凡逸志)에서 말하고 있다. 1932년 11월 선생이 오문(澳門)에 피신하여 있을 때 상해 동북의용군 후원회장 왕보진이 고아동으로 가던 도중 옥문에 들린 기회에 김구, 안중근과 같이 한중협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임시정부 경제 후원회를 중한연합동화의용군대회라 고쳐 한중합작의 항일전을 펼것을 정하여 본거지를 광동에 두고 김구, 왕보진, 황명당을 위원으로 하여 동북 의용군의 후원기금을 모집하는데 노력하였다. 또 광동에 있는 한국국민당 전위총무를 한국 독립당 광동지부라 개칭하고 양명진, 이식부를 상무위원으로 하고 중국 국민당의 보조를 받아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 배일원중공작에 활약을 하였다. 윤의사 의거로 중국 조야에 우리 임정에 대한 신망이 높아져 장개석 주석의 명을 받은 중국 국민당의 조직부장, 진과부의 연락으로 선생은 1932년 5월 김구선생을 모시고 장개석을 남경중앙 군관학교 구내에서 면회케하여 한중양거두의 역사적 회견에서 다음 세 가지 조건을 확약 받았다. 1.한국 독립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도와줄 것. 2.중국교육기관에서 한국청년의 교육을 해줄 것. 3.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가의 지원과 교포의 보호 이 한중혁명의 영수회담이야 말로 한중합작 항일전의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고 이 협정은 8·15광복까지 굳게 지켜졌다. 1938년 중일전쟁시의 기강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고 1940년 9월에 임정 이중경으로 옮겨져 10월에 국무위원에 피임되고 학무, 법무, 선전, 생계의 4부가 증설되자 선생은 법무부장으로 피임되어 법 재정리에 진력하였다. 1944년 2월 신헌법에 의하여 국무위원을 개선할 때 또 다시 당선되어 임시정부의 고문까지 겸하며 광복까지 다난하였던 전시 내각의 중책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후 선생은 김구선생의 남북협상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세로 인하여 수도육군 병원에 입원 가료중 1949년 3월 9일 조국통일을 보지 못하고 향년 66세로 서거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영결식은 이승만 대통령, 이시영 부퉁령, 김구, 조완구 등 옛 동지가 모인 가운데 간소하게 거행되었다.   

질문[유래] 충절의 일편단심 월계단 설치 유래

유구한 역사 속에 폭풍우가 회오리 바람과 함께 사라진 불사구이군 불굴의 애국충절 옥중에서 갖은 몰매와 고통 속에서 사라진 사육신(李塏, 朴彭年, 成三問, 河緯地, 柳誠源, 兪應孚)과 살아서 단종을 끝까지 섬기겠다는 굳은 절개 생육신(李孟專, 趙旅, 元昊, 金時習, 成聃壽, 南孝溫) 철퇴와 몽둥이를 맞고 쓰러진 육절신(皇甫仁, 金宗瑞, 鄭 , 金文起, 閔伸, 趙克 寬) 이러한 비운은 국운이 빚어낸 한스러운 천운이리라. 그런 가운데 본군 관하에 성스런 월계단(육절신)이 세워진 것이다.  이는 광탄면 창만리에서 태어나신 지봉 황보인 정승의 묘가 있는 이곳 문현의 고향에서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져 이루어진 것이리라. 이에 동조한 장의 심의택, 의연유사 이건칠, 장재 조경증, 간사 이영학, 영건 노재일, 단유사 이택용, 주창 이학노, 조병설(掌議沈宜澤, 義涓有司李建七, 掌財趙慶增, 幹事李泳學, 營建盧在一, 壇有司李宅鎔, 主倡李學魯, 曺秉卨)직원 김진태 이택현 신재모 윤일학 안필수 권병준 이범철 성낙유 황우현 성낙춘 김한필 윤재낙 이영덕 안익수 노재일 조희춘 안필수 이종항 윤재선 이문현 윤구헌 정운경 이병함 윤면학 심선익(直員 金振泰 李宅絃 辛在謀 尹逸學 安必壽 權丙準 李範轍 成樂遊 黃偶顯 成樂春 金漢弼 尹在洛 李泳德 安翼壽 盧在一 趙熙春 安弼壽 李鐘恒 尹在璇 李文鉉 尹龜憲 鄭雲慶 李炳咸 尹勉學 沈宣益)등 유림 30여명들은 1020년(庚申) 6월 3일 발기 선현들이 어려운 여건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진 거룩한 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단을 모시고 매년 향사를 받들어 오던중 6·25사변 후 결례하고 있어 군내 유림들이 늘 고심끝에 30여년이나 지난 오늘날에서야 이를 계승하고져 1985년 12월 3일 발기 86년 2월 21일 파주애국지사 유지 정화추진위원회를 구성 국회의원 이용호를 위원장으로 추대 각종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군내 유림들이 우선 월계단 영모회 임원을 배정 도유사 최병덕(都有司 崔炳德)을 선임 각읍면별 장의 11명 정기용, 박도용, 박노성, 이문성, 박만석, 정태신, 최경태, 이용범, 권영상, 이문재, 윤경현(鄭奇溶, 朴燾鏞, 朴魯聖, 李文性, 朴萬石, 鄭泰信, 崔景台, 李龍範, 權寧相, 李文在, 尹庚鉉)과 감사 최인태, 황의록(崔仁泰, 黃義祿)을 엄선하였다.   

질문[유래] 거룩한 율곡 시묘살이와 생애에 얽힌 유래

명종이 등극하자 서정을 쇄신할 위사공신 홍언필이 영의정에 오르고 전임 대사헌 진복창(陳復昌)은 을사사화(乙巳士禍)직후 사관으로 있던 안명세(安明世)를 비롯하여 반대세력의 사람들을 무고한 죄목으로 죽이고 혹은 귀향을 보냄으로서 조정의 신진학자와 문신들을 일소하게 되었다. 이를 근심한 명종 임금은 명종 3년(1548) 4월에 별시문과(別試文科)를 비롯하여 진사시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과거가 학문연구의 기본목표는 아니었지만 부모에게 효도하는 의미로서 율곡선생은 13세때 어린 나이로 초시인 진사시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관들이 여러답안들을 심사하여 장원을 뽑아놓고 보니 어린소년 율곡선생의 걸작품으로 승문관에서 모두 놀라움을 금치못한 특례라 하겠으며 이는 우리 나라 유교문화의 대종이 될 등용문이었다. 명종 5년(1550) 율곡이 15세 당시 아버지 이원수공이 찰방직에서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승진된 이듬해 봄 청진동에서 삼천동으로 집을 옮기고 관서지방을 순찰하게 되었는데 맏아들 선(璿)과 셋째아들 이(珥)를 대동하고 한양을 떠나 수개월이 지나 공무를 마치고 명종 6년(1551) 5월 17일 마포서강나루터에 도착하자 부인의 별세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유달리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율곡 소년에게는 실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슬픔속에서 고향인 파주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하에 안장하게 되자 어린 소년 율곡 선생도 16세 당시 시묘살이를 하게 되었다. 인생이란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살아야 하며 울고, 웃고 고뇌와 번민을 겪어야 하는가, 날이 갈수록 율곡은 극도로 비관하여 허무감에 사로잡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친우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송익필(宋翼弼), 성혼(成渾)등은 율곡을 위로하기 위하여 효도의 길을 상하지 말라며 사서오경(四書五經) 책자를 묘막으로 보내주었다 한다. 그리하여 독서에 전념하면서 3년의 기나긴 세월동안 시묘살이를 마치고 명종 8년(1553) 18세때 어머님 “신사임당 행장기”를 지었으며 외조부 신진사의 행장기와 외조모 용인이씨의 감천기(感天記), 진복창기(陳復昌記)를 지었다. 그해 가을 어느 날 울적한 심회를 풀길이 없어 발길닿는대로 거닐다가 뚝섬 강건너 봉은사(奉恩寺)를 가게되었는데 승방에 들러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탑상위에 있는 불교서적을 뒤적이게 되었다. 어쩌면 인생문제를 풀어볼 해답이 그 책안에 담겨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하여 불교에는 죽음에 대한 해명의 철학이 있다는 것과 내세관(來世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은 그전에도 묘막에서 중국의 노자와 장자(老子, 莊子)의 철인의 글(189종)을 읽은바 있지만은 허무감에 사로잡힌 율곡은 인생문제의 규명을 시도하며 선학에 입문할 것을 생각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19세 되는해 봄 금강산으로 입산하게 되었다. 속세(俗世)를 등지고 금강산으로 입산한 율곡은 마하연(摩河衍)에 이르러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으로 눈을 감고 정좌하여 모든 계율(戒律)을 굳게 지키며 침식을 잊고 불도를 탐구하기에 정진하였다. 이렇게 성도(成道)의 경지에 들어선 율곡은 금강(金剛), 봉래(蓬萊), 풍악(楓岳), 개골(皆骨) 산중의 유명한 선방과 이름높은 대사(大師)를 찾아다니며 문답식으로 불도의 진리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유교에서 시발하여 불교의 선학에 들어간 율곡이 2년동안 정진하여 그 철리(哲理)를 규명한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암굴(岩窟)속의 노승(老僧)과 대담중 그 질문에 응한 율곡의 선학에 대한 답변은 “고기가 물속에서 뛰고 솔개가 하늘을 날음은 위아래가 마찬가지고 저런것 모두가 색(色)도 아니요 공(空)도 아니다. 즉 어약연비상하동 적반비 색연비공(魚躍鳶飛上下同 適般非色鳶非空)이라 하였다. 율곡이 선학을 탐구한 결과로 얻은 인생문제의 해답은 불교가 인간세상의 무상에 환멸을 느끼고 내세(來世)의 복락(福樂)을 기원(祈願)하며 속죄하는 수양으로 고해(苦海)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수업임을 알았으며 “인간의 도리를 먼저 깨달은 자가 후진을 지도하고 구제하며 함께 올바른 사회를 이룩하자는 목표 즉 세상을 건지고 천하를 다스려보자는 이상(理想)에 있거늘.” 부모형제 처자를 저버리는 윤리를 저버리고 혼자만이 공문(空門)에 도취함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유학의 인생철학으로 돌아와 현실을 긍정하고 경국제민(經國濟民)을 위한 학문의 길로 매진하였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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