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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모음

질문[전설] 옥석동(玉石洞)에 얽힌 전설

 고려말 조선조에 조연(趙涓)이란 충신이 있었다. 환조(桓祖)(조선 태조의 부)의 장녀 정화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387년(고려우왕 1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개국 후 왕을 호위하면서 1400년 제 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조선 태종)을 돕는 등의 공을 세운후 좌명공신이 되었다. 세종때에는 조선땅이 두만강에 이르는 국토확장에 공을 세워 세종 8년(1426년)에 우의정을 지냈으며 그의 묘소가 월롱면 덕은리 산 45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일생동안 우국충정을 하다 세종 11년(1429)에 돌아가시니 임금이 옥석비를 하사하여 예장을 치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묘소를 안치한 마을을 옥석동이라 불려지고 있다, 1519년(중종 14년) 조온(양절공)의 현손 조광조(趙光祖)가 왕도정치 및 개혁정치를 펼 때 반대 세력들이 궁중의 오동나무에 「走, 肖, 爲, 王」이란 글자모양으로 꿀을 발라놓아(내용인즉 走자와 肖자가 합치니 趙자가 되어 조광조가 왕을 속이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뜻을 나타냄) 벌레가 꿀을 먹어 「趙爲王」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자 이를 핑계로 조광조를 모함하니 조광조는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왕을 폐하겠다는 역적의 누명을 쓰고 문중의 뿌리까지 뽑힐지경에 이르는 한편 조상의 묘를 파헤쳐 시신을 꺼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지경에 이르자 옥석비의 주인인 조연(趙涓)의 묘소까지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옥비를 마을 어귀 논가운데 묻어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그 후 당시의 상황을 까맣게 잊을 만큼 세월이 흘러 끝내는 자손들이 趙涓의 묘소 위치까지 잊게되어 문중에서는 조상을 모시지 못하는 죄를 스스로 지고 말았다. 그러던 중 문중의 누군가가 황해도 무슨무슨 고을 군수로 행차하던중 지금의 파주 지역에서 머물다가 밤에 현몽을 꾸었다. 꿈속에 백마를 탄 신령이 나타나 서쪽 방향을 가리키며 어느어느 방향에 너희가 찾는 묘소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기며 다음날 아침 일어나보니 흰눈이 무릎까지 왔는데 새벽 길에 서쪽방향으로 말발자국이 나 있었다. 꿈속에서 신령이 말한 방향으로 나타난 발자국을 따라 십리를 가니 말발자국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앞에 묘소가 있어 파보니 그것이 곧 태조의 생질인 趙涓의 묘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 자손들은 묘소를 정비하고 숨겨진 옥비를 찾고져 수많은 세월을 흘려 보냈다. 결국 찾지는 못하고 지금 마을어귀 한 곳에 그 옥비가 묻혀있을 것이라 믿고 들에 나가면 조상의 얼이 숨긴 그 옥비가 혹시나 삽자루밑에 걸리지나 않나 하는 기대속에서 한양조씨 일가는 오늘도 살고 있다. 

질문[전설] 양미골 연자방아에 얽힌 전설

 파평면 덕천리 양미골 뒷산 비탈진 후미진 도랑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고려말 유관(柳寬)전승을 지낸 사람은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급제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면서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 공신이 된 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 관사를 겸직하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좌빈객을 역임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高麗史)를 수고하는 등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대학자였다.  선생은 고향인 파평면 양미골에 본가를 두고 서울 동대문밖에 초가삼간을 짓고 살면서 집옆에 연자방아를 만들어 동리 사람들이 방아를 찧어가고 내는 방아세로 연명을 하였으며 울타리도 없으며 여름철에 비가 오면 지붕이 세는 초라한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청백리에 녹선된 강직한 선비이다. 그 당시 좌우승지로 이조 참의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있는 이희가 문안차 유관선생을 방문했다가 너무나 초라한 광경을 보고 사재로 울타리와 집과 방앗간 지붕을 수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대노(大怒)하면서 어찌하여 경상감사가 재산이 많아 남의 집까지 돕고자 하느냐며 호통을 치니 이희는 이 보수비용은 조상님의 유산이 좀 있어 마련한 것이니 조금도 국록을 축낸 것이 아님을 아뢰오니 선생은 즉시 이희 재산을 조사토록 한 바 사실과 틀림이 없었다 한다. 어느 날 유관 선생은 이희에게 말하길 내가 먼저 세상을 뜨거든 이 연자방아를 고향으로 옮겨 내 마누라(老妻)가 여생을 살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한 후 돌아가시니 이희는 그 유언에 따라 연자방아를 현 파평면 덕천리 양미골로 옮기어 같이 살게 되었다 하며 사모님이 별세하여 후손이 없는 처지인지라 연자방아는 자연적으로 경주이씨 이희가 관리하면서부터 수백년이 흘러 오늘까지 내려오다가 일제를 거쳐 6·25동란으로 말미암아 훼손되고 자취만 남아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원한의 요귀복수에 얽힌 전설

  조선조 중종때 판중추부사를 지낸 조광원(曺光遠)선생은 월롱면 도내리에 묘가 있는 분으로써 예조참의로 있을 당시 1540년 천추사로 중국 명나라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웅주고을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고을 관속이 관아 객사를 두고도 별사로 인도하길래 질책을 하니 관속이 하는말이 객관에는 요귀가 있어 투숙하는 관리마다 죽게되어 폐사된지 오래 되었다고 하자 선생은 이 말을 믿지 않고 고을 수령이 극구 간청함에도 불구하고 관아 객사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사방에 촛불을 밝히고 침석에 들자 여러 관속들은 요귀에게 폐를 당하여 송장을 치게 되었다고 수근 거리며 물러갔다. 밤이 깊어 삼사오경이 되자 별안간 일진 폭풍이 불며 병풍이 넘어지고 촛불이 꺼지며 암흑세계가 되었다. 이리하여 큰 기침을 하며 벌떡 일어나 보니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이 찢어지더니 사지가 분산되어 허리부분과 머리가 각각 연속적으로 떨어져 그것이 한데 붙어 한 여인이 되었는데 피부는 흰 눈같이 희고 벌거벗은 나체의 여인이 피를 흘리며 흐느껴 울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선생은 정색을 하고 소리를 높여 「너는 어떠한 요귀이길래 여러 관원을 해하였으며 또 어느 안전이라고 내앞에 나타났느냐」고 꾸짖으니 「소첩은 억울한 원한이 있어서 여러 번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 존엄하신 선생님을 뵙게되어 사연을 말씀드리게 되어 한맺힌 원한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 사연인즉 소첩은 이 고을 관기로써 모년 모월 모일에 사또의 숙청을 들어 이방에서 자다가 밤이 깊어 소피를 보려고 나가는 도중 퇴아래서 상직을 하던 관노가 달려들어 겁탈 하려 하기에 한사코 반항을 하자 입을 막고 옥을 찢으며 뒷동산으로 업혀가 겁탈 하기에 거역을 하니 소첩의 사지를 찢어 염사하고 큰 바위 밑에 암장하여 원귀가 방황하게 된 것」이라며 흐느껴 울면서 사라졌다. 이 말을 가상히 여긴 선생께서는 곰곰히 생각을 하면서 날이 밝은 즉시 사령을 비롯한 관속들을 불러 관기 명단을 점거하는 한편 요귀가 말한 뒷동산에 올라가 현장을 살피며 큰 돌을 들게 하니 과연 창백한 시체가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로 있어 시신을 정원뜰에 가져다 놓고 모관노를 꾸짖으며 신문을 하니 이실직고하여 사죄를 청하는지라 수령에게 명하여 엄벌케하고 시신은 염습하여 후히 장례를 치루어주니 그 후 부터는 요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大東奇聞에서)  

질문[전설] 고려 궁터에 얽힌 전설

 눌노천이 흐르는 하류 파평면 금파리 지역 임진강변 언덕에 궁터가 있었으니 이는 옛날 파해평사현(坡害平史縣) 고을이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현 금파리와 장파리 구역 십여리나 되는 편편한 장마루 언덕이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고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은 개성에 도읍할 당시 임진강변 주위에 토성을 쌓아 놓고 이 고을 청사가 있던 자리에 아담한 이궁(離宮)을 건립하여 임금이 자주 왕래하였다고 한다. 이 궁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산중턱에 샘물이 있으며 궁궐에서 사용하면서 임금님이 잡수시었다는 어수(御水)가 있는데 물맛이 좋아 약수로 이용되었고 수원이 많아 1978년부터 이 물은 금파리 주민들의 상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또한 고려가 망할 당시 돌위에 좀이 먹는다는 석두충(石頭蟲) 말머리에 뿔이 난다는 마두각(馬頭角), 까마귀 머리가 희게 된다는 오두백(烏頭白)이라는 세가지 유언비어가 이곳에서 나왔으며 그렇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州北二十里 坡平山下源出積城 入臨津傍岸有弓 五川宮遺墟 礎石尙存有石 蠱馬角烏白之傳說(坡州郡誌) (주북이십리 파평산하원출적성 입임진방안유궁 오천궁유허 초석상존유석 고마각오백지전설)  

질문[전설] 오금리(吾今里)에 얽힌 전설

 구분 : 전설 해당지역 : 파주시 > 탄현면 > 오금리   오금리(吾今里)는 옛날 질오목(叱吾目)과 오고미(烏告美) 부락으로 되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면, 리, 동)변경에 따라 질오목에 오(吾)자와 오금미의 금(今)자를 따서 오금리로 부르게 되었다. 이는 조선조 세조대왕 당시 우참찬(右參贊)이며 밀산군(密山君)으로 계시였던 박중순(朴仲孫)이 세조 12년(1466) 55세로 돌아가시니 묘자리를 선택하고저 명지사가 명당자리를 물색하던중 이곳 월롱산하 아가산 내령에 명지가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국사봉을 지나 구미봉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명지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중 임진강변 북맹을 따라 더듬어 내려가면서 매봉재를 거쳐 신선봉 무장봉을 지나 호피산 머리부락에 이르러 서성거리며 「내눈이 멀었구나」하며 꾸짖어 한탄을 하던중 갑자기 매봉재에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려 이상히 생각하고 까마귀 우는 곳으로 올라가 자세히 살피니 대지가 있는데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눈이 멀었도다」하며 「까마귀 네가 너무 아름답고 어여쁘구나」「나는 도와 명지를 일러 주었도다」하였다. 후일 호피산 아래에 있는 부락을 질오목이라 하고 매봉재가 있는 마을을 오금리라 호칭하게 되었다 한다. 이로 인하여 밀양박씨 후손들이 대가를 이루워 묘하에 살고 있다.   

질문[전설] 감악산(紺嶽山)에 얽힌 전설

 이 산은 옛날 경기 오악(松岳, 紺岳, 雲岳, 北岳, 冠岳)중에 하나로서 감악사(紺嶽寺), 신암사(神岩寺), 운계사(雲溪寺)등이 있었고 정상에 산신과 설인귀(薛仁貴)를 모시고 제사지냈다는 감악사(紺嶽祀)가 있었다 한다. 고려시인 임춘(林春)은 감악산의 형상을 잘 표현한 시를 소개하기로 한다. 조물소아진호배롱(造物小兒眞好弄) : 조물주는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좋아하였는지/ 박사희작천봉상(博沙戱作千峯象) : 모래를 모아다가 많은 산봉우리를 만들었네/ 자산수미강수주(玆山首尾羌數州) : 이 산머리에서 끝까지 몇 고을을 깔고 앉았는데/ 천외회상여무봉(天外廻翔如舞鳳) : 그 모습 하늘을 뚫고 나는 봉황과 같도다/ 감악사는 현재 폐사되었으나 적성면 객현리 배문리 마을에서 약 500미터 거리에 절터가 남아 있는데 이 절에서 고려때 황빈열이라는 사람이 과거를 보려고 이 절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무렵 동각태학사(東閣太學士) 김신윤(金莘尹)이 술을 거나하게 취하여 권세가 있는 송도 사람들을 욕을 하다가 미움을 받고 도망을 나와 감악산에 들어와 잠시 묵어가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니 황빈연이 늙고 피곤한 모습을 가엾이 여겨 허락을 하였더니 하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자고 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화로에 부젓가락으로 재를 뒤적거리며 글자를 그리므로 좌중사람들이 늙은이가 글자를 안다고 힐난을 하였다. 아침이 되어 김신윤의 아들 온기가 과거에 급제하여 찾아와서 뜰아래에서 절을 하니 황빈연이 깜짝 놀라며 땅에 엎드려 사과를 하는지라 김신윤이 웃으며 말하기를 범주가 진나라의 재상이 된 것을 어찌 궁한 늙은이가 이미 알았으랴 하고 서로 북쪽 산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밑 돌 위에 앉아 술을 같이 마시고 즐기면서 송풍(松風)을 제목으로 연구(聯句)를 지었는데학한난득수 승정독여롱 (鶴寒難得睡 僧定獨如聾)(金莘尹) 날씨가 추우니 학은 잠들기 어렵고 중이 좌선에 드니 벙어리와 같고나 단송현원용흔장백학충 (斷送玄猿傭欣場白鶴沖) (黃彬烈) 검은 원숭이 휘파람 불어보내고 백학은 하늘을 뚫고 날아가네 감악사는 신라에서 설인귀를 산신으로 삼았다고 내려오고 있으며 고려 현종 5년 글안군사가 장단에 이르렀을 때 감악산에서 정기(旌旗)와 군사가 있는 듯 함으로 크게 두려워하고 감히 전진을 못하였다 하며 고려 충렬왕은 원나라 황제를 도와 내안(乃顔)을 토벌하려 할 적에 설인귀를 제2신으로 봉해서 도만호(都萬戶)를 삼고 신의 음공(蔭功)을 빌었다 한다.신라이당장설인귀위산신 본조명산재중사춘추(新羅以唐將薛仁貴爲山神 本朝名山載中祀春秋)강향축이제 고려현종오년단병지장단감악사약(降香祝以祭 高麗顯宗五年丹兵至長湍紺岳祠若) 유정기사마단병구이부감전우충열왕장특여원조제(有旌旗士馬丹兵具以不敢前又忠烈王將特如元助帝) 토급안봉신제이위도만호익익음공야(討及顔封神第二爲都萬戶益翼蔭功也)(積城邑誌) 또한 선비와 서민 모두가 감악산의 산신을 숭상하고 공경해 친제를 올렸는데 당시 지중문하사(知中門下事) 민유(閔儒) 전소윤(前少尹) 김서지(金瑞芝)등이 감악산에 제사를 지내려고 장단진(두지진)을 건너다가 익사하게 되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방우정(方于楨)이 제사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여 일시 중단되었다 한다. 충선왕3년4월제감악산시유상귀공향토서개친제(忠宣王三年四月祭紺岳山時裕尙鬼公鄕土庶皆親祭)  

질문[전설] 질오목(叱吾目) 유래의 전설

  장릉(長陵) 이장으로 박중손(朴仲孫)의 묘소가 헐리고 다른 묘자리를 찾게 되었는데 지관이 묘자리를 찾으러 이 곳 질오목(질우목)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까마귀가 까옥까옥 하고 울어댔다. 지관이 그 까마귀 소리가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묘자리를 지나쳐 왔다. 돌아서서 까마귀 우는 곳으로 가서 보니 때는 겨울이라 눈이 온 천하를 덮었는데도 한 곳에 눈이 녹아 있었다. 가서 살펴보니 과연 좋은 묘자리였다. 그래서 까마귀 소리를 듣고 돌아섰던 자리를 질오목(叱吾目)이라 명명하였다.   이것은 “ 내 눈을 꾸짖는다.” 하는 뜻으로 묘자리를 찾지 못한 내 눈을 꾸짖는다 라는 것이다. 또 까마귀가 울던 곳을 오고미(烏告美)라 하였는데 이것은 까마귀가 알렸다 하는 뜻이다. 또 질오목과 오고미 사이에 “진말모퉁이” “선모루” “대종모퉁이” 등의 지명이 있는데 그 지관이 질오목까지 짓밟아 왔다 하여 진말 모퉁이, 섰다 하여 선모루, 대종없이 왔다 하여 대종 모퉁이 등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질문[전설] 고려 목종 공능(恭陵) 퇴골에 얽힌 전설

목종은 고려 제7대왕(경종의 장자)으로 성종 17년(997)에 왕위에 올라 문식 양반 및 군인의 전시과(田柴科)를 개정하고 민간문역으로 주철(鑄鐵)사용을 완화시켰으며 도성에 육위군영을 세우는 한편 12절도를 4도호와 동서북 방어 진사, 현령, 진장 등을 두었다. 그리고 군현에 말단종사하는 호장을 우대 은여를 베풀었으며 삼경십도에 박사 사장(博士師長)에게 명하여 인재를 양성케하고 재능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교 신앙을 국교로 삼고 생모인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원당(願堂)으로 도성내 진관사와 숭교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과 여진에 침입 방어시설도 튼튼히 구축 경비를 강화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기었다. 목종은 부왕인 경종이 두 왕후를 두었는데 헌애왕후(천추태후)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모두 태조의 7자 욱(旭) 딸이며(성종과 자매) 외가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하였다. 그러나 경종이 돌아간 뒤 천추태후와 외척되는 김치양 사이에 추문이 생겨 성종이 김치양을 먼곳으로 보냈으나 성종이 붕(崩)하고 목종이 18세에 즉위한후 김치양을 소환 우복야 삼사사에 임명되니 백관 모두가 그의 손에 움직이게 되었다. 또한 목종 6년에 이르러 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어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려고 음모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 목종에게도 자손이 없으며 태조 후손이 끊어져 오직 헌정왕후에게 태어난 대양원군(詢)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태후는 대양원군을 꺼려하던 나머지 12세시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移寓)시킨 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사살하고자 하였으나 그 절의 노승이 내실 자리 밑에 구멍을 뚫어 놓고 위급할 때 그를 그 속에 숨겨 화를 면하게 하였다 한다.이러던 중 목종 12년 1월 16일 갑자기 대부에 있는 유거에서 불이나 천추전까지 연소되어 목종은 비탄한 나머지 병이 생겨 위중하게 되자 중추원부사 채충순을 불러 경은 중추원사 최항과 힘을 다하여 대양원군을 후계자로 삼고 사직을 지키도록 하명하는 한편 서경도순검사 강조를 불러 입위케하자 부사 이현운과 더불어 5천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개경으로 들어와 목종 12년(1009) 2월 2일 글을 올려 왕께 아뢰기를 간당이 틈을 엿보고 있으니 황주 귀법사에 출어하시기를 청한 후 대초문을 들어오니 목종은 태후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궁인 내시와 채충순, 유충정 등을 데리고 법왕사로 은신하게 되었다. 강조는 대양원군을 연총전에서 제8대왕으로 현종을 즉위시키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인을 사살하고 당류와 태후 친속 30여명을 해도로 귀향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어 파수케하는 한편 귀법사를 거쳐 충주로 방출케 되니 목종과 태후는 삼필의 말을 얻어 타고 그곳을 행하여 가는 도중 목종은 어의를 벗어주고 식물과 바꾸어 태후에게 드리는 한편 식사시에 소반과 그릇을 받들었으며 태후가 말을 탈 때에는 고삐를 잡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한다. 강조는 몹시 불안을 느껴 적성에 이르렀을 때 현종 1년 3월 1일 사람을 보내어 목종을 죽이고 문비(門扉)로서 관(棺)을 삼아 현관에 안치하였다가 익월 현남(?)에 화장한 후 공능이라 하였으며 태후는 그곳을 도망하여 황주로 가서 현종 20년 여생을 마치었다 한다. 튀골 뒤 산기슭(현 적성면 마지리)은 감악산 서맥 월출봉하 폭포가 흐르고 경관이 아름다운 산골짜기로 고려 제7대왕 목종이 처절하게 사라져간 유일한 고려 문화재이다. 그리하여 파주문화원에서는 이를 추모하고저 지난 91년 5월 공능 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안이씨 종중 소유로 있는 임야 100여평을 기증 받아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질문[전설] 호대감에 얽힌 이야기의 전설

옛날 탄현면 성동리 요풍동에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뒷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그들은 나무를 하다가 쉬는 틈을 타서 돌을 산 밑으로 굴리면서 장난을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씨가 굴린 돌이 밑으로 굴러가 산 중턱에 있던 호랑이 굴을 건드렸다.  그러자 깜짝 놀란 호랑이는 굴 밖으로 뛰어 나와 사람들을 쫓아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기겁을 하여 나뭇짐을 놔둔 채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나는데 한계가 있어 사람들은 도망가기를 포기하였다. 그러자 그호랑이는 쫒아와서 다른사람들은 그냥 놔두고 돌을 굴린 이씨의 발뒤꿈치를 물어서 죽인 뒤 돌아가 버렸다. 그 이후 요풍동 사람들은 그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지금까지 3년에 한 번씩 호대감이라 하여 전주 이씨의 조상을 위하는 산제를 지내게 되었 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질문[전설] 중성문기(重城門記) 유래에 얽힌 전설

 적성도 작은 고을이니 예전 명칭은 내소(來蘇)이고 고려적에 여러번 개성·양주의 속읍으로 되었다가 뒤에 다시 현으로 되었는데 관아는 본디 산성 남쪽에 있었다. 토지가 척박하고 토산물이 보잘 것 없어 세금과 부역을 능히 바치지 못하니 수령된 자가 모두 걱정하였다. 고려말에 죄신(罪臣) 임치(林緻)의 집을 몰수하여, 관사로 만들어 옮겼다. 태수(太守) 한옹(韓雍)이 관아를 짓기 시작하였고 사군(使君) 이명성(李明誠)·박흥군(朴興君)·박하신(朴河信)이 잇달아 지어서 완성하였다. 그러나 규모가 작았고 세월이 오래됨으로 말미암아 거의 무너졌다. 뒤에 원으로 오는 자가 그대로 썼을 뿐이고 수리하지 않았다.  을축년(1445)에 견성(甄城)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와서 정사에 임하면서 1년이 채 못되어 정사가 정리되고 폐단이 없어졌다. 이에 민중을 모아서 의논하기를,“대저 관사라는 것은 빈객을 받들고 관부(官府)의 위의(威義:위엄있는 몸가짐이나 차림새)를 엄하게 하는 것이거늘, 이제 황폐하여도 수리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다. 내가 수령이 되어서 그 직책에 마땅하지 못할까 두려워, 엎어지고 넘어진 것을 그냥 보기만 하고 걱정을 뒤에 오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차마 못하겠다. 철거하여 일신하게 하고자 하니 어떠한가.”한즉, 뭇사람이 “모두 명에 따르겠다.”하였다. 후가 이에 감사에게 보고하여 나라에 알려서 윤허를 얻었다. 후가 녹봉(祿俸)을 내어서 쓰임새에 밑천으로 하고 또 백성으로서 품 팔려는 자를 허락하였다. 드디어 공인(工人)과 재목을 모아서 옛터에다가 설계를 보태기도 줄이기도 하였다. 남북으로 대청 세 간을 각각 세웠는데, 크고 넓으며 모두 앞뒤로 달아내어서 동쪽 곁에는 온돌방이 있고 또 넓혀서 마루를 만들었다. 남쪽으로 긴 골마루를 만들었고 복판은 마루이다. 창고와 행랑은 모두 단청(丹靑)을 칠했는데 옛날에 빠졌던 것이 지금은 완전하다. 썩은 것을 깨끗하게, 낮은 것을 높게 하였다. 보는 자가 장하게 여기고 사신과 빈객으로서 이 고을을 지나는 자도 또한 후의 훌륭한 치적을 알았다. 금년 가을에 벼슬의 임기가 끝나 임금이 불러가려 하니, 그 고을 부로(父老)가 만류하고자 하여도 허락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글로 지어서 그 사람이 간 뒤에 사모하는 뜻을 표시하기를 원하고, 드디어 나에게 기문하기를 청하였다. 나는 후의 친족이다. 평소부터 후의 치민(治民)하는 재주에 탄복하였거니와 지금 또 고을 사람에게 물었다. 후가 적성에 장사한 지 6년 동안 백성의 애모하는 마음이 하루같고 또 수십년이나 황폐했던 관사를 수치(修治)하였으니, 백성에게 폐가 없었을까 하였으나 일전이라도 하민(下民)에게 징수한 것이 없었고 노역이 농군(農軍)에게 미치지 않았다 하니 또한 어렵지 않은가.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백성을 편하게 할 목적으로 시키면 백성이 비록 수고하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하였다. 하물며 수고하게 하지도 않음에랴. 후의 치민하는 재주 있음을 내가 더욱 알게 되었다. 아, 짓는 어려움보다 중수하는 것이 더 어렵다. 지금 후의 이번 거조는 또한 그 어려운 것을 겸했다 할 수 있다. 대저 앞사람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은 뒷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후를 이어 오는 자도 능히 후가 애쓴 것을 저버리지 않으면 적성의 관사는 전과 같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적성 백성도 또한 그 덕을 입을 것이다. 후의 이름은 숙희(叔喜)인데 세족(世族)의 주손(胄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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